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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아 Jun 18. 2020

도망한 것으로부터 도망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산다는 건 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인생이란 놈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절대로 우리가 알게 앞통수를 치는 법이 없다고 - 노희경 <그들이 사는 세상> 




제주에 다녀왔다. 생각해보면 한 쿼터가 끝날 때 즈음엔 늘 제주행 티켓을 끊었던 것 같다. 쿼터 동안 또 전력 질주해버린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건 아니었다. 그러기엔 늘, 쿼터 끝나려면 한 달 정도 남았을 때 제주로 도망가버렸으니까. 더는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악의 가득한 적대를 품고 있는 나를, 가끔 날 세우며 그것을 드러내는 나를, 그리고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었던 나를. 


그곳에서 하릴없이 일했다. 그랬다 나는 여행을 간 게 아니었다. '리모트 워크'라는 걸 꾸준히 시도하는 중이었고, 제주를 다녀오면서도 단 하루의 휴가도 내지 않았다. 어느 새부터인가 제주는 여행의 대상이 아니었다. 한 곳에 머물며 그곳을 돌아다니고, 바다를 응시하고, 그래도 맛있다는 집을 검색해서 들르는 것. 제주행의 유일한 목적이자 낙이었다. 이번에도 조천리의 오-피스제주에 머물며, 눈을 뜨는 새벽부터 퇴근시간까지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잠깐 고개를 들면 바다가 보였고, 그거면 충분했다. 내 신체가 사무실에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 날카롭게 벼려있던 내면의 적의를 거둬들일 수 있었다. 그저 내가 오늘 해야 하는 일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누군가는 "리모트 워크를 하면, 일을 더 많이 하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퇴근시간을 조금 이르게 정한다. 해가 떠 있을 때가 좋겠다. 대신 아침 일찍 일을 시작한다. 다행히 아침형 인간이고, 아침이 가장 크리에이티브한 시간이니까. 아무도 (메신저로) 말을 걸지 않을 때, 생각보다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다. 그렇게 8시간을 꽉 채운 날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냈다. 혹은 집중한 덕에 더 내실 있는 콘텐츠를 썼거나. 불행 중 다행인지, 다행 중 불행인지 이번 여행에서는 잠을 제대로 못 잤다. 뽈과 대화하다 잠들 정도로 피곤해도, 2시간이면 다시 깨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책을 읽기는 어려우니 마음에 짐처럼 쌓여 있던 일을 하나씩 처리했다. 그렇게 모니터를 보고 있으면 금세 창밖으로 동이 튼다. 동시에 마을의 하얀 가로등이 켜지고 저 멀리서는 고기잡이 배가 나타난다. 그 새벽녘의 바다가 어찌나 아름답던지. 완전히 밝아질 때까지 창밖만 내다보았다. 그러고는 낮잠을 자거나, 노을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이것은 고양이와 뽈입니다.




이상할 정도로 일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게 나의 유일한 도피처였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은 시간은 고통이다. 내가 게으른 사람이 된 것 같다는 죄책감, 그리고 곧 "어떤 생각"이 파고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두려움을 피해 행동을 시작한다. 책을 읽거나, TV를 보거나, 아니면 언제나 넘치는 일을 처리해버리거나.


몇 년 전, 교환학생을 갔던 후배 H가 별이 되어 돌아왔다. 그날은 두 번째 회사의 마지막 면접 날이었고, 면접 준비를 위해 일찍 일어났다가 페이스북에서 우연찮게 그 사실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되었다. 진짜냐고, 정말 진짜냐고 몇 번을 되묻다 H와 함께 속했던 동아리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라는 말을 썼던 것 같다. 내가 고를 수 있는 가장 감정적이지 않고, 담담한 언어였다. 후에 누군가는 이 문장 때문에 H의 죽음이 더욱 믿기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어떻게 면접을 봤는지도 모르겠다. 사당에서 평창동을 가는 버스 안에서 내내 울었고, 면접장 근처 카페에서도 내내 울었다. 팅팅 부은 얼굴로 면접에 들어갔고, 질문에 생각할 경황도 없이 대답을 뱉었다. 아마 대부분 진솔한 대답이었으리라. 그로부터 2주 뒤에 H가 돌아왔고, 첫 출근 전날 여수에 내려가 H가 좋아하던 노래를 부르며 그를 떠나보냈다. 


사실, 직전해 겨울부터 옅은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었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길을 걷다가, 버스를 타고 가다가 툭 울음이 터져 나오는 날이 많아졌다. 삶을 더 버틸 수가 없었다. 그저 오늘 눈을 감으면, 내일은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매일 되뇌며 잠에 들었다. 그렇지만 야속하게도 시간은 성실했고, 나는 매일 눈을 떴으며, 혼자 집에 있으면 밀려오는 생각들 - 대부분 나를 좀먹고, 상처 입히는 -을 견딜 수가 없어 친구들을 붙잡았다. 당시 퇴근하면 - 저녁 먹는다며 술 먹고 - 막차가 끊겨서야 택시를 타고 귀가하는 날이 더 많았다. 그렇게 간신히 붙잡고 있던 끈이, H가 사라지면서 툭 끊어졌다. 


H와 절친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만나면, 언제나 가장 밝은 미소를 지으며 "언니~"를 부르곤 했다. 나는 그런 H를 귀찮아했다. 약속에 늦는 일이 잦았고, 질문이 많았다. 나는 그가 독립적이거나 주체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졸업 이후엔 연락을 거의 안 하고 살았다. 그러나 동아리라는 매개체로 그의 소식을 꾸준히 듣고, 만나는 자리가 있었기에  나의 오해는 점점 깊어져만 갔다. 그런데 H가 이제 없다. 오해한 것을 사과할 기회가 사라진 거다. 나와 (아마 많은) 선후배는 그 점을 마음에 두었다. 사과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은 오롯이 남겨진 사람들의 것이었다. 아니, 사실 처음부터 짊어지기로 예정되었던 벌일지도 모르겠다. 


그때부터 스스로를 좋아할 수 없었다. 우울한 감정은 고장 난 기관차처럼 폭주하기 시작했고, 정상생활을 하기가 어려웠던 때가 있었다. 출근 2주 만에 대표님께 불려 가 "왜 입사하자마자 죽상을 하고 있느냐. 새로 팀원 온다고 들떠있었는데, 신입사원답게 잘해 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고, 그 자리에서 나는 상황을 설명하며 내가 불편하시다면 퇴사하겠다고 했던 것 같다. (그때 퇴사를 했어야 했나)


가장 바닥을 찍었을 때 곁에서 나를 돌봐준 게 문어 친구들이다. 같은 팀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나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어주고 함께 시간을 내어준 문어들 덕분에 수개월을 무탈히 보낼 수 있었다. 마음은 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었지만, 겉에서 보기에는 조금 멀쩡한 사람인 척할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야림, 동그라미, 그리고 뽈에게 고마웠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2017년의 우리들아 잘 지내니이 (오겡끼데스까-) 


그해 가을, 조금씩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일을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늘 일은 넘쳤고, 편집은 집중을 요하는 일이었으며, 시간은 잘도 갔다. 집에까지 원고를 들고 와 붙들고 있는 날이 많았는데 '잘 해내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어서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이 시간이 지나가버렸으면 좋겠다'는 의미였다. 여전히 나에게 시간은 그런 것이다. 어서 지나갔으면 좋겠는 것.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거나, 이 힘든 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이라도 있으면 납득이 될 텐데. 그저 이 시간을 보내버리고 싶어서 자꾸만 무언가를 한다. 책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거나, 대부분의 시간 일을 하거나. 




그러니 제주를 간 것은 도망한 것으로부터 도망이다. 왜냐고 물으면서도 삶이 지속되어야 한다면, 우리 자주 도망을 가자. 도망치는 것은 부끄럽지만 도움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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