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짓는 할머니
세월에 떠밀려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가 읽는 동화.
by
연영
Feb 25. 2021
옛날 어느 마을에 마음씨 좋은 할머니가 살고 계셨어요.
지붕에 너와가 더덕더덕 겹친 한 집에선 언제나 뽀얀 밥 짓는 연기가 피어났어요.
바로 할머니 댁이었답니다.
마당에 삐들삐들 마른 고사리를 가마솥 가득 삶아 무르게 하고 누런 콩가루를 뒤섞어 한 김 쪄냅니다. 집간장을 붓고, 볶은 깨, 꼬소한 참기름을 둘러 맛있는 고사리나물이 다 되어갈 무렵 알감자랑 같이 앉힌 밥도 다 되었나 봅니다.
장날에 사 놓은 마른 장어를 손으로 툭툭 분질러 끓는 물에 넣고, 다진 마늘, 대파, 양파들도 숭덩숭덩 썰어 빠뜨립니다. 고추장 한 국자, 고추가루 한 국자, 집간장 한 국자를 넣고 아궁이 아래로 장작을 너댓게 더 밀어 넣으시네요.
이제 할머니는 지나던 마을 사람들을 불러 상에 앉히고 밥을 나눕니다.
어떤 그릇은 크고 또 어떤 것은 작고, 수저도 모자라지만 모두 함께하는 식사는 즐겁습니다.
오늘도 음식을 나누고 마음도 나누는 따뜻한 자리입니다.
냇가 얼음들이 탁 깨어지고 나뭇가지 새 순이 오를 무렵 밤나무집 할아버지는 시름이 깊었어요.
오래 기르던 소가 늙고 병들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한 지가 벌써 사흘째였지요.
할아버지는 커다란 눈을 들어 할아버지를 쳐다보는 소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어요.
그저 등을 긁어주고. 눈꼽 낀 두 눈을 손바닥으로 쓸어 줄 뿐이었답니다.
마을 사람들은 봄이 올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지만 집에만 계시고 도무지 나오시지 않으시는 밤나무집 할아버지를 걱정했어요.
어느 날 저녁, 늙은 호박을 처억처억 썰어내어 밀가루 반죽에 부쳐낸 할머니도 마을 회관에 갔다가 밤나무집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으셨어요.
할머니는 꼬부랑 허리에 자그마한 몸이지만 곧장 파릇파릇 쑥을 뜯으러 산으로 올라가셨어요.
어찌나 잰 걸음이신지 젊은 새댁은 따라가지도 못 했어요
얼었던 땅을 뚫고 올라온 쑥을 폭...폭...뽑아선 개울에 설렁설렁 헹궈주고
겨우내 뒤주 한 쪽에 싸뒀던 찹쌀에 휘적휘적 섞어 한 김 쪄내지요.
향긋한 쏙 냄새가 돌담을 넘어가고 할머니는 시원한 물 한 바가지를 절구에 부어넣고 행주질을 하십니다.
더운 김나는 쑥밥을 절구로 쿵쿵 찧어 고소한 콩가루에 뒹굴려 주니 쑥떡이 되었어요.
아랫집 이장님이 참깨농사 잘 되었다며 짜다 주신 참기름도 쓱쓱 발라주지요.
이제 이 쑥떡은 마을 어귀 쉬어 가는 마을 사람들 요기도 되고, 이장 집에 참기름 잘 먹었다 인사도 되고, 먼지 나는 마당에서 땅따먹기 하는 코흘리개들 간식도 됩니다.
할머니는 쑥떡 덩이들을 조신한 그릇에 담으시더니 밤나무집 할아버지 댁을 찾아가셨어요.
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할아버지는 내심 쑥떡이 반가웠지만
“만다꼬 여까지 오십니꺼... 회관에 놓고 드시지...괜히 귀찮구로...”
말을 맺기도 전에 목구멍으로 침이 꼴깍 넘어갑니다.
할머니는 말없이 미소를 지으시며 마루 한 쪽에 쑥떡 그릇을 놓아두시고는 외양간을 둘러보십니다.
구석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는 늙은 소가 고개를 들어 그렁그렁 큰 눈망울로 할머니를 올려다보지만 이내 툭 떨구고 말아요.
할머니는 치마 춤으로 손을 넣으시더니 색이 바래 이제는 하얘져버린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내십니다.
주머니 끈이 풀리자 코를 간질이는 쑥 향이 가득하네요. 산에 들에 나는 예사 쑥 향은 아닌 것 같지요?
소도 그 향을 맡은 것인지 얼른 고개를 듭니다.
할머니는 투박한 손으로 푸른 쑥 한줌을 꺼내 소에게 먹이십니다.
“아이고, 잘 묵네. 그래 마이 무라...그래야 기운을 채리지...”
반달 같은 눈으로 가득 웃어주시는 할머니는 연신 밤나무집 소를 쓰다듬었습니다.
소를 뒤로 하고 마당으로 나온 할머니는 어느새 비어버린 쑥떡 그릇을 안고 할아버지께 인사를 하십니다.
“갈랍니더. 내일 우리 밭 한번 갈아줄랑교? 콩 좀 심굴라고...”
밤나무집 할아버지는 고개를 저으십니다.
“소가 늙어가~인자 몬합니더...내도 늙었고...이장 집에 이야기 하이소.”
할머니는 미소와 함께 뒤돌아 가십니다.
그날 저녁, 할머니 돌담 너머로는 구수만 된장 냄새, 짭조름한 자반 찌는 냄새, 달큰한 밥물 끓는 냄새가 넘실거리고 밤이 찾아옵니다.
별도 달도 잠든 밤, 밤나무집 할아버지는 소가 못내 걱정되어 외양간을 둘러보십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누런 눈꼽 가득 낀 눈으로 바로 서지도 못했던 소가 더운 숨을 훅훅 내쉬며 네 발로 서서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네요.
잘 버텨준 소의 등을 쓸어주며 밤나무집 할아버지가 말했어요.
“할매가 고치주드나? 허허허...인자 살긋나? 허허허 참말로 신통하데이. 날 밝으면 내캉 할매 밭 갈러 함 가보자.”
어스름 동이 트고 할머니 댁에선 밥 짓는 연기가 뽀얗게 오르기 시작합니다.
밤나무집 할아버지가 할머니댁 밭을 갈러 소 몰고 오시면 할머니는 어떤 맛있는 새참을 내어가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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