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시.
아빠집에서 가져 온 맥주까지 모두 비웠다.
식탁정리는 내일로 미뤄두고 앙치질을 하러 들어간다.
거울 속에 나는 발그레한 얼굴이다.
오늘 하루도 잘 보낸 것 같다.
초등학교 땐 그렇지 못한 날도 많았다.
나는 학교에서 발표도 잘하고 숙제도 잘하고 하교후에 친구들이랑 공놀이까지 하며 잘 지냈지만 저녁무렵 엄마, 아빠의 싸움으로 결국 울다 잠드는 날, 나는 하루를 망친 것 같았다.
‘누구에게나 꺼내보기 힘든 인생의 장면이 있다.’
어린 아이는 부모의 사정에 따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일 뿐, 혼자 결정할 수 없다.
억울한 부분이라 할 수 있겠지만 세상에 모든 아이들에게 주어진 상황일 뿐 도리가 없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참 서럽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불행했던 날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지난 시간을 걸어왔을 수도 있고, 네 발로 기어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지금에 이르렀다.
과거의 사건이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이제 당신은 스스로의 행, 불행을 결정할 수 있을 만큼 자랐다."
지금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바로 보자.
오직 나만 할 수 있다.
피할 도리가 없었던 과거의 어느 시점에 묶여 계속 힘들어하는 것은 지긋지긋하다.
우리 집 펜트리에는 유행하는 수제 맥주기계, 오븐 겸용 에어프라이기, 스타일러, 대용량 두루마리 휴지 등 넣을 것들이 차고 넘치니 이제 15년 전 비싸게 샀지만 한 번 쓰고 고장 나 볼 때마다 속상한 디지털 카메라 정도는 재활용 쓰레기장에 내놓자.
그 속에 담긴 사진들은 추억으로 외장하드에 저장하면 된다.
자꾸자꾸 꺼내보며 더 이상 속상해 말자.
당신의 아픔이 디지털 카메라 정도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신형 세탁기처럼 쌩쌩 돌아가는 기억일지라도 당신은 벗어날 수 있다.
그 전원버튼을 꺼버릴 의지만 있다면.
우리는 어른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