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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유 Oct 06. 2024

나의 실패가 너로 인해 내 탓이 되어버린다

3부 아빠 독립시키기

냉장고에서 나온 조각케이크가 녹아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커피잔에서 흐른 물을 닦고 의자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카페 문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다시 계산대 앞으로 향했다. 많이 봐야 스무 살 중반쯤 되었을까? 앳되어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가까이 가자 파마약 냄새가 코 점막을 자극했다. 미용실에 다녀온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었다.

“티라미수 하나 계산해 주세요. 케이크는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떤 것 때문에 그러실까요?”

서비스로 받은 케이크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했다. 커피가 늦게 나와서 기분이 좋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그것 때문에 같이 온 일행과 불화가 생긴 건 아니라는 점. 고마운 마음만 받고 내가 먹은 케이크 값은 결제하겠다고 말했다.

“그거 제가 실수한 거여서요.”

당사자 앞에서 치부를 들추어버렸다. 생각도 못 한 일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때 주인아주머니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우리 아들이 있지 3년 만에 공무원으로 합격했어. 그동안 공부만 했으니까 친구도 만나고 여행도 다녀오라고 했는데 엄마 가게 돕겠다고 나와서 일하는 거 있지?”

얼마나 알리고 싶었을까?  처음 보는 손님 앞에서 아들 자랑하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승천하는 입꼬리 보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보통의 가족은 저런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더 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보답하지 못해서 죄스러운 사이. 고객을 응대하는 남자의 광대에 두 개의 빨간 자두가 익어가는 모습을 보자. 한참 취업 준비를 하던 스물두 살의 기억이 떠올랐다.     


“네가 나를 다시 병원에 입원시키려고 작정했구나.”

“죄송해요. 그런데 이것까지만 하고 잘게요.”

아버지와 함께 사는 곳은 1.5룸 다가구 주택. 몇 평인지도 모르고 계약한 집은 화장실과 주방 침실로 나뉘어있었다. 양극성정동장애를 앓고 있는 아버지. 그는 아침, 점심, 저녁, 자기 전 약을 먹었는데 특히 저녁때부터 민감해졌다. 마감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부터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수면시간을 놓치면 밤새 뜬눈으로 지새워야 하는 사람.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평생 가난의 굴레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 자야 하는 사람과 잠을 잘 수 없는 사람의 힘겨루기. 컴퓨터와 스탠드를 켜고 자기소개서와 인·적성검사, 면접 준비하면서도 그의 심정을 알기에 공부하는 시간을 줄이려 노력했다.


그와 힘싸움에서 이번에도 내가 졌다. 주방 식탁을 치우고 안방에서 스탠드와 멀티콘센트를 가져와 연결했다. 필기도구와 연습장 문제지를 펼쳐놓고 공부했다. 문을 닫아도 빛이 새어 들어가서 형광등은 켤 수 없었다.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500자 자기소개서를 쓰고 면접 준비했다. 매일 30분씩 인·적성 시험지를 풀었고,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며 1분 PR, 30초 분량의 마무리 인사를 연습했다. 잠결에 화장실에 가던 아버지 발에, 주방 바닥에 내려놓았던 수저통이 걸려 쏟아졌다. 그는 짜증 섞인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좀 쉬운 길로 가라. 왜 네 엄마가 가라는 회사는 안 들어가는 거야?”

“아직 젊으니까요. 딱 한 번만 도전할게요.”

그 당시 내가 아르바이트하고 장학금을 모은 돈으로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과 재산분할소송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에 관해서 둘이 함께 상의하고 이야기했다. 이상하게 그 둘의 의견에 따르고 싶지 않았다. 자꾸만 나의 눈과 귀를 가리고 벼랑 끝으로 내모는 느낌을 받았다.     


“너 하나도 젊지 않아. 예전 같으면 이미 장가가서 애가 둘일 나이야. 아직도 아르바이트나 하고 있고 잘한다. 잘해.”

나에게 취업하라고 권유했던 회사는 H자동차그룹의 1차 밴더 변속기 공장이었다. 연봉과 복지도 나쁘지 않았다. 지방 소도시에 살면서 안정적으로 먹고살기에 충분했다. 다만 그곳은 어머니가 10년 이상 무기계약직으로 근무 중인 회사였다. 그의 마수가 사방에 뻗쳐있었다. 그곳에 발을 딛는 순간, 나의 무덤 될 것은 시나리오처럼 명확했다. 생활보장대상자의 삶을 극적으로 변화시키고. 어머니와 연결점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판을 뒤집어야 했다.

“무조건 서류는 통과할 거예요. 반듯이 최종면접까지 갈 거라 확신해요. 조금만 더 기다려볼게요”

나의 취업과 거처에 대해서만큼은 둘이서 한마음 한뜻이었다. 어머니가 재직 중인 곳에 들어가면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눈과 귀가 되어 소식을 전할 것이다. 내 월급에 10원 단위까지 그의 귀에 들어가겠지. 아버지도 내가 취업하면 좋을 것이다. 지금보다 나은 집과 먹거리는 물론이고, 용돈도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겠지. 그 두 사람에게는 손해가 단 하나도 없는 남는 장사였다. 오롯이 나 한 사람만 참고 희생당하면 말이다.     


스무 살 초반 나는 힐링 문학에 빠져있었다. 특히 김재동을 좋아했다. 그의 강연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너무 편해지고 가스 활명수처럼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판사의 망치와 목수의 망치가 동등한 가치를 가져야 한다. 취업이 잘 되는 사회를 만들던가!」 같은 말이 좋았다. 취업 준비하던 어느 날 알리바바 마윈 회장의 인터넷 기사를 읽었다.「당신이 35살까지 가난하다면 그건 당신 탓이다.」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부모 잘못 만난 탓, 사회 탓, 정치 탓. 남 탓만 하며 살았던 나에게 원초적 질문을 던져주었다.

‘정말 나의 탓은 없는가?’


도리스 메르틴의 저서 아비투스에서 크랩멘털리티라는 말이 나온다.

“어부들은 게를 잡아 바구니에 던져 넣고 뚜껑을 닫지 않는다. 게들이 바구니에서 기어올라 탈출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 이유는 높이 기어오른 게를 다른 게들이 아래로 끌어내려 주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둘의 마음이 하나로 맞았던 건. 내가 바구니를 탈출하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누구도 지옥의 아래의 바닥. 심연에서 빠져나가면 안 된다. 내가 벗어나는 순간. 그들의 실패가 확정되어 버린다. 그들도 젊었을 때 심연을 빠져나갈 힘과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가족 탓, 사회 탓, 정치 탓을 하다가 그 시기를 놓쳐버렸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고 자리합리화를 한다. 나 때문이 아닌 남 때문에 못 한 거니까. 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자식이, 나보다 못났다고 생각했던 저놈이. 지옥을 해 집고 위로 올라가면. 나의 실패가 내 탓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이곳을 빠져나가면 안 된다.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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