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덮은 음식의 맛

[Diary of Japan] 일본 산골마을 다이어리 #4

by 지후


아침부터 비가 오던 수요일, 식당에 들어서자 에밀리와 잰이 벌써 요리를 하고 있었다.


“언니 좋은 아침! 오늘도 늦잠 잔 거야?”

야채를 손질하던 잰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싱가폴에서 온 그녀는 나보다 여섯 살 어렸지만, ‘언니’라는 단어를 알려준 뒤로는 언제나 “지후 언니-!”하고 나를 불렀다.


“지후, 아까 깨우러 갔는데 자는 것 같아서 먼저 왔어.”

얼굴에 밀가루를 잔뜩 묻힌 에밀리가 말했다.


캐나다 출신인 그녀는 중국계 이민 2세로,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대학교 과제와 화상 미팅까지 하는 똑 부러진 아이였지만, 방 안에서 벌레를 발견하고는 기절할 듯이 소리를 지르거나 좋아하는 남자애 이야기에 얼굴이 붉어지는 영락없는 열아홉 살이었다.


요리를 시작하기에 앞서 손을 씻던 중,

이제는 머리카락까지 밀가루 투성이가 된 에밀리를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에밀리, 너 점점 밀가루가 되어가고 있어.”

“Oh my god! 나 계속 이러고 있었던 거야?”


에밀리는 집에서 자주 먹던 만두를 만들고 있었다. 혼자서 만드는 건 처음이라며 반죽에 열중하는 얼굴에 땀이 맺혀 있었다.



주방 안쪽에서는 기름 튀는 소리가 폭죽처럼 터졌다. 잰의 버섯튀김이었다.


잰은 버섯이 머금고 있는 수분 탓에 사방으로 기름이 튀자 아예 멀찍이 떨어져서 버섯을 프라이팬에 던지기 시작했다.


“잰, 너 지금 버섯을 던지고 있잖아.”

“언니, 기름이 너무 뜨거운 걸 어떡해.”


이처럼 주방은 곧 손님을 맞을 식당이라기보다는 마치 중학교 교실과 같았다. 요리 실력 역시 중학생 정도에 버금가는 실력이라, 우리는 항상 자신이 만든 음식을 서로의 입에 넣어주며 먹을 만 한지, 짜지는 않은지 물어보고는 했다.



나는 양파 볶음을 만들기로 했다. 잘게 썬 양파에 간장과 설탕을 넣고 볶아내면 끝. 소박하지만 부드러운 단맛 덕분에 밥반찬으로 충분히 든든하다.


양파 볶음을 처음 만든 건 10여 년 전, 지리산 산골 마을에서 살던 중학생 때였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초등학교 3학년의 어느 봄, 하동에 살고 있는 삼촌 집을 다녀온 뒤로 내 마음은 늘 산과 강, 나무와 꽃으로 가득해졌다.



그러다 우연히 대안학교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 공교육을 대안하는 교육이라나, 공동체를 배우는 곳이라나.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나에게는 어려운 단어 투성이었지만 시골 마을에서 함께 먹고 잔다는 말에 나는 서울을 떠나 지리산의 어느 학교로 입학했다.


거기서 처음으로 요리를 배웠다.


평일 아침과 주말 세 끼는 학생들이 돌아가며 만들었는데, 새벽 6시, 졸린 눈을 비비며 냄비에 물을 올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요리는 누군가에게는 타고난 일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서툰 일이었다. 불행히도 후자의 경우에 해당되는 아이들이 식사 당번이 될 때면 아침마다 탄 밥을 먹어야 했다. 그러다 반찬으로 만든 계란 후라이가 하나라도 모자라면 식당은 금세 전쟁터가 되었다.


읍내까지 걸어서 40분, 생태주의라는 이름 아래 고기반찬은 달에 한 번 나올까 말까. 배가 너무 고파 학교 근처 등산길에 있는 낡은 주막으로 달려가 몰래 라면을 먹고 돌아오기도 했다.


꿈에 그리던 시골 생활은 생각보다 늘 허기졌지만, 대신 계절에 따라 변하는 음식의 맛을 알게 되었다.



봄이면 논에 모를 심고,

여름이 오면 밭에서 토마토를 따먹고,

가을이 오면 벼를 베고,

겨울이 오면 배추를 수확해 김치를 담그고는 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몸을 움직이는 시간이 많았던 나의 중학 시절.


그렇게 세 번의 사 계절을 보내고 고등학생이 되어 강화도로, 성인이 되어 다시 서울로, 그러다 영국의 시골 농장과 교토의 녹차밭을 거쳐, 지금 나는 유후인의 작은 식당에 있다.


매일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들며 문득 생각한다. 내 앞의 이 음식은 지금의 내가 아니라 과거의 기억이 만든 것이 아닐까. 엄마의 반죽을 떠올리며 만두를 빚는 에밀리처럼, 중학생 시절의 양파 볶음이 지금 내 손끝에 되살아나듯.


기억은 쉽게 바뀌지만,

기억이 남긴 맛과 냄새는 변하지 않는다.


눈과 코, 입에 닿았던 그때 그대로,

잊혀졌던 것은 언젠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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