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은 운이 좀 좋은 것 같아요
모닝루틴에 하루 30분 독서, 30분 글쓰기를 더했다. 올해 목표는 영어였기에 지난 1월부터 지금까지 10개월 넘게 영어공부에만 시간을 쏟았다. 그러나 한 가지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다 보니 집중력이 흐트러졌고 독서와 글쓰기에 대한 갈증이 생겨났다. 독서,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영어도 평생 갈고닦아야 할 역량이라면 작은 시간 단위라도 루틴 안에 포함시키야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지난 10개월 간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원하는 만큼은 아니지만 실력은 향상되었을 거라고 믿기로 했다.
글쓰기를 하면 거대한 주제를 꺼내어 놓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일상에서 겪은 일들과 그 소감을 정리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 글쓰기와 멀어졌던 지난 1년 간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때때로 힘을 얻었다. 대부분의 글은 출판되거나 편집되지 않은, 개인 블로그에 써 내려간 날 것의 글이었다. 나도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나누면서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제주도를 처음 방문했다. 다들 11년 만에 하는 제주도 여행이라고 말하면 의아해한다. 어떻게 그 11년 동안 한 번도 제주도로 여행을 안 갈 수가 있냐고 말이다. 제주도를 여행하지 않겠다고 다짐씩이야 한 건 아니지만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방문했던 제주도에 별다른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가 가장 크다. 정해놓은 코스대로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여행은 정말이지 고역이었다. 기억에 남는 장면이라고는 친구들과 웃고 떠들었던 기억밖에 없다. 제주도의 어떤 관광지를 방문했는지 신기하게도 아무런 기억이 없다. 고등학생 때였으면 딱 하나라도 기억할 법도 한데 나는 누군가 차려주는 밥상처럼 주어지는 여행에 아무런 감흥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 때는 내가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대학생이 된 이후에는 국내여행보다는 해외여행이 우선이었다. 이미 상업화되고 있었던 제주도를 여행하는 비용보다 동남아를 여행하는 편이 나았다. 일상을 떠나 이국적인 환경에 노출되기 위해 택하는 것이 여행이라면 한국어가 들리지 않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음식에, 눈이 빠지도록 구글 지도를 열심히 보아야 겨우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낯선 곳이 좋았다. 인스타그램 뉴스피드에 올라오는 제주도 사진은 여행 욕구를 잠깐 자극하긴 했지만 동행할 사람을 찾고 비행기 티켓을 끊는 의식적인 수준까지 나아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늘 길이 막혔다. 못해도 1년에 한 번은 해외여행을 갔었는데 코로나-19 팬데믹이 심해지면서 묶인 몸이 되었다. 시간이나 돈이 없어서 여행을 못하는 가정은 해봤어도 전염병으로 인해 하늘 길이 막혀버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대안으로 제주를 택했고 여행이 고팠던 나도 방법이 없었다. 지난 7월 저녁 다혜 언니와 만났을 때 여행 얘기가 나왔다. 출장이 끝난 후 10월쯤 제주 여행을 가기로 했다. 일단 비행기표를 끊으니 다음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됐다.
드디어 제주로 여행을 떠나는 날, 김포공항도 국내선 비행기도 11년 만에 처음이기 때문에 어쩐지 낯설었다. 공항철도를 타고 보통은 아주 오래 자리를 지켜야 하지만 금방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수요일이었지만 앞뒤로 개천절과 한글날 연휴가 껴서 그런지 여행객이 꽤 많았다. 저가항공 비행기가 원래 이렇게 좁았나 싶을 정도로 간격이 좁은 좌석에 사람들이 빽빽했다. 일찍부터 움직인 탓에 금방 피곤해져서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 보니 제주도에 도착했다.
숙소 로비에 짐을 맡기고 배를 든든하게 채운 후 제주 바다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근처 곽지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에메랄드빛 바다라는 표현이 왜 탄생했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청명한 바다였다. 언젠가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에서 섬 투어를 했을 때 봤던 물 색깔이 비슷했다. 청록색 바다와 대비되는 검은 현무암이 바다를 든든하게 지탱해주고 있었다. 고운 모래알과 땀을 식혀주는 바람은 덤이었다. 아름다웠다. 내 11년 전 기억 속에 있는 제주가 그동안 꽤나 억울했을 것 같았다. 다시 한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흙 소품 만들기 체험이었다. 애월읍 번대동에 위치한 '공방노아'에서 에어비앤비로 사전에 예약 후 참여할 수 있었다. 나는 손으로 무엇인가 만드는 일에 굉장히 서툴다. 못한다는 표현은 언젠가 잘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때문에 쓰고 싶지 않다. 때로는 못하기 때문에 겁 없이 할 수 있는 일들도 많다. 제주도까지 여행을 왔으니 두고두고 추억할 만한 소품을 하나 만들고 싶었다.
마침 우리 언니가 요새 반려식물 키우기에 매료되어 화분을 만드려고 했다. 그러나 공방노아 사장님이 바닥을 뚫을 필요가 없어 난이도가 조금 낮은 꽃병을 추천해주셨다. 책을 읽거나 공부할 때 내가 직접 만든 꽃병에 꽂혀있는 꽃을 보면 내내 뿌듯할 것 같았다. 사장님의 가르침 덕에 똥손이지만 나름대로 볼품 있는 꽃병이 탄생했다. 이렇게 손님들이 만든 작품은 초벌구이와 재벌구이를 거쳐 한 두 달 후 배송된다고 한다. 여행에서 멀어져 일상의 패턴에 완전히 적응되는 즈음에 배송을 받아보면 너무 행복할 것 같다.
작업을 마치고 나니 벌써 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여행 첫날 마지막 코스인 새별오름에 가기 위해 택시를 부르고 노아 사장님과 까뭉이와 잠시 시간을 보냈다. 사장님은 서울에서 제주도 넘어온 지 어느덧 10년이 넘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제주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며 금전적으로 부족함 없이 지내는 삶은 어떨까 상상해봤다. 사장님은 서울이 그립다고 하셨다. 서울에 있는 사람은 제주를 부러워하고 제주에 있는 사람은 서울이 그리운 어긋남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았다. 이런 대화를 할 때마다 나는 과연 얼마나 더 서울에 머물 수 있을까 막연하게 가늠해보곤 한다. 노아 사장님과 까뭉이에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 새별오름으로 향했다.
제주도의 가을은 억새라는 말을 익히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딜 가든 억새가 가득했다. 그러나 제주도 특유의 지형인 오름과 억새가 만나면 그 매력은 더욱 빛을 발한다. 언덕 너머로 수북하게 깔려 있는 억새밭과 억새를 은은하게 빛내는 해 질 녘 노을의 조화가 너무나 아름답다. 얇은 로퍼를 신고 새별오름을 올랐는데 운동화를 신고 오를 걸 몇 번이고 후회했다. 힘들 때는 잠시 뒤를 돌아 올라온 길을 따라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30분쯤 오르다 보니 마침내 정상에 도착했다. 힘들지만 오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오전 일찍부터 제주에 도착해 쌓인 피로가 한순간에 녹는 듯했다. 아쉽지만 더욱 어두워지기 전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