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역사가 보장하는 기록의 존재가치
평소 이성보다는 직관을 따르는 편이다. 인간관계 뿐만 아니라 진로 등 모든 부분에서 그렇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문제 상황에 직면하면 어딘가에 내재되어 있는 데이터들이 한 순간에 Y/N 답을 내고 뒤늦게야 머리가 그 이유를 찾아 나선다. 귀납법보다는 연역법에 가깝다. 이런 사고방식이 내 인생에 도움이 되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상황을 가정한다는 건 어디까지나 상상이지 사실이 아니니까.
채용공고를 보았을 때도 그랬다. 공고를 보자마자 지원하기로 결심했다. 원서 접수와 세 번의 면접을 준비하면서 당시 다니고 있던 공공기관보다 대학교 기록연구사가 커리어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이 직장에 뼈를 묻을 것이냐고 누군가 말한다면 확답할 수는 없다. 다만 그 당시에는 대학교 기록연구사로 이직하는 길이 더 낫다는 직관이 들었을 뿐이다.
이직한 후 벌써 8개월이 흐른 지금 내가 이직을, 대학교 교직원을 택한 이유를 생각해봤다. 직관에 구체적 이유를 붙이고 싶어졌다. 그동안 근무하면서 잠시 스쳐 지나갔던 생각을 글로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기록관리라는 직무적 특성이 반영된 관점이라는 것을 감안해주시길 바란다.
우리 대학은 일제강점기인 1939년 최초로 설립되었다. 물론 우리나라에 이보다 더 오래된 대학은 많다. 그러나 기록연구사가 배치되어 있는 정부부처 및 공공기관, 사기업을 모두 포함했을 때 존속기간이 이처럼 오래된 곳은 드물다. 경력이 짧은 내가 개교 83주년인 학교의 역사를 책임진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임이 틀림없다.
이유는 살아있는 기록의 유한한 수명 때문이다. 유형과 매체에 따라 수명이 짧은 기록과 긴 기록이 있을 뿐 전자기록이든 비전자기록이든 한번 생산된 기록물은 언젠가 그 생애를 마감한다. 이러한 기록의 노후화에 대비하여, 특히 대학의 핵심적인 역사와 정체성을 대변하는 영구기록물을 항상 관리 가능한 범위 안에 포함시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기록관리 담당자는 이러한 책임을 일차적으로 맡아야 한다.
기관이 설립된지 오래되고, 기록 생산연도의 스펙트럼이 넓어질수록 관리가 까다로운 것은 당연하다. 시대에 따라 상이하고 다양한 기록 도구의 특성을 파악하고, 기록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알맞은 처방전을 내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보존에 취약한 기록이더라도 서고에서만 잠자고 있다면 기록의 가치를 충분히 발현하기 어렵다. 보존도 중요하지만 기록이 필요한 이용자에게 닿을 수 있도록 기록물 열람 등 활용도 적절히 보장해야 한다. 보존과 활용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셈이다.
그러나 오랜 역사가 꼭 부담스러운 측면만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편한 점도 있다. 이 점이 바로 내가 대학교 기록연구사로 일하기를 택한 가장 큰 이유다. 그 이유는 굳이 힘주어 말하지 않아도 구성원들 사이에서 기록관리의 중요성이 공유된다는 데 있다. 물론 구체적인 기록관리 방법을 고민하는 건 기록전문가의 역할이지만, 역사의 연장선상에 있는 구성원들은 오랜 세월이 증명하는 기록의 존재가치를 믿는다. 그 믿음에 기대어 기록관리 정책을 비교적 쉽게 설득하고 행할 수 있다는 건 행운임이 틀림없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음에도 나는 구성원들의 기록관리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훨씬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라고 보았다. 기록관리 정책은 기록관리 담당자와 그 부서가 고민하는 영역이지만 기록관리 중요성은 기관의 구성원 전반이 공감해야 보장되는 영역이므로 폭이 훨씬 넓다. 기관의 역사를 담보로 구성원들의 인식을 거저 얻을 수 있는 건 기록전문가의 입장에서는 출발선에서 앞장 서 있다는 말이다.
글을 쓰는 행위가 이로운 이유는 객관적으로 상황을 분석하게 해주면서 동시에 새로운 자극과 원동력을 준다. 이 유리한 출발선을 어떻게 잘 이용할 것인지는 앞으로의 나에게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