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꾼 꿈을 휴대폰에 검색해 본다. 얼마나 깊이 몰입했었는지 잠에서 깨면 힘이 축 빠질 정도다. 혹여 빠뜨린 장면은 없는지 떠올리며 장면별로 디테일한 분위기, 감정, 행동, 말, 표정까지 낱낱이 기억해 내기 위해 집중한다. 포털사이트에 '과일이 나오는 꿈',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오는 꿈' 등의 단어 몇 개로 쉽사리 해석할 수 있는 꿈이 아니다. 너무도 장황한 꿈들만 꾼다. 그래서 항상 정확한 해몽에 실패한다.(정확한 답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나의 이런 패턴은 새벽녘에 잠에서 깨어나 가장 먼저 하는 루틴 중 하나다. 어쩌면 그 꿈이 내게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란 이상한 기대 심리도 한 몫 한다. 한국인에게만 주로 보인다는 꿈에 대한 믿음. 혹여 예지몽은 아닐지 생각하며. 곱게 포장해보면 그저 무언가를 대비하고 한 발 앞서서 준비하려는 마음일 것이다.
꿈은 100% 확신할 수 없다. 이런들 저런들 당사자의 심리에 기반한 '참고사항'에 지나지 않은 걸 알지만 계속해서 디테일함을 강조하며 몇 번이고 다시 검색해 본다. 가끔은 챗gpt까지 동원해 가면서. 혹시 틀린 답을 주진 않았을지 의심하며 같은 질문을 계속 한다. 이런 식으로 집착하는 모습은 지인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다. 하지만 그저 정보수집에 특화된 시스템에 불과한 챗gpt에게는 가능하리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궁금증을 해소하는데 급급해진 내 모습을 본다.
누군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그것이 '나', '가족', '그 밖의 인연' 누구에게든) '준비성'을 빙자해 애꿎은 검색 시스템을 혹사시키는 셈이다. 많은 정보를 제공 받은뒤 '고마워'라는 챗gpt 답장 한 줄을 덧 붙이는 것에도 '공해'에 해당하는 자연적 환경적 손실이 발생한다는데 어쩌면 나도 공해와 오염의 주범이 된 건 아닐까? 그러고도 누구도 실망시키지 않는 마음이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까?
매일을 누군가를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눈물 흘리게 하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그리 살겠노라고 빌고 또 빌며 기도한다. 거꾸로 생각하면 그간 여러 사람에게 상처 주며 살아왔다는 말과 같다. 상처라는 건 수치화 할 수 없지만 할 수만 있다면 누군가를 아프게 한만큼 가서 몇 날 며칠이고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며 그가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서 그도 나도 다시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할 수만 있다면.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알고도 준 상처, 모르고도 준 상처로 셀 수 없이 서른아홉 해를 꽉 채워왔다. 제로베이스라는 말을 떠올린것 부터가 욕심이다. 오직 완전무결한 상태에 있으려하는 아만심과 욕심.
나에게 받은 상처를 반면교사 삼아 다른 이에게 더 큰 사랑과 친절을 베풀며 살거나 나 같은 부류의 사람을 상종하지 않겠노라 다짐하게 한 이가 있다면 차라리 잘된 일이다. 그는 나로 인해 더 이상 아파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니까. 허나 여전히 셀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이미 활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은 상처들에 대해 나는 딱 한 가지 기준을 세웠다.
'내가 생각했을 때 상대의 마음이 안 좋을 것 이라고 예상되면 그 행동은 두 번 다시 하지 말자.'
지극히 당연한 말인데 삶에서 이 다짐을 매순간 떠올리는 일은 생각보다 꽤 어렵다. 내 생각에는 상대의 마음이 안 좋을 것 같았는데 상대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되려 그런 소심한 사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는 실례를 저질렀다는 걸 들키게 될 수도 있다.
어느날엔 상대의 표정이 어둡게 느껴져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혹 내가 실수한 게 있는 건 아닐지 조심스러워 지기도 한다. 오직 상처주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순간을 참지 못하고 그의 마음을 후벼파듯 일방적으로 확인해내고 말던 내 모습도 본다. 그런 내 모습을 자신에게 다가와주는 다정함으로 받아들일 수 도 있지만 상대로 하여금 '내 표정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인가'라는 마음을 들게 할 수도 있다.
이것을 조율하는 것이 내게는 참 어려웠다. 상대의 감정은 상대의 것이니 내가 뭐라 할 수 없는 일이다. 선의라 해도 상대의 고유한 것에 대해 함부로 드러난 모습만 보고 추측하는 일이 결코 옳은 행동이 아니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 허나 상대와의 교감이 줄어들게 될 수도 있다. 나는 이 고민하나가 해결되지 않아 그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한 관계 속 미흡함이 많았다.
어쩐지 계속해서 책임만 쌓이는 것 같은 30~40대가 되어보니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으려 하기보다 '선을 지키는 것' 그러니까 '적당한 무관심'이 더 깊은 예의라는 것도 알 것 같다.
모든 걸 통달한 듯 입과 손가락으로 빠르게 토해내는 순간과 달리 일상의 대부분의 순간마다 나는 여전히 늘 아는 것과 경험한 것, 그것에 대한 가치와 혼동 될 때가 많다. 한 때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 정답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던 적도 있다. 굳이 답을 찾겠다며.
오히려 정답이 없고, 심지어 정확한 수치의 답을 찾을 필요조차 없다는 것. 그저 순리대로 흐름에 따라 사는 것이 피차 자연스럽고 편하다는 것을 안다. 자연스럽지 못한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며 트러블이 생기거나 이견이 생겼을 때 보통의 사람들은 그것을 다름으로 인식할 뿐 틀림으로 바라보지 얂는다는 것도.
누군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늘 한걸음 먼저 걷는 속도로 예측하고 추측하고 상상했던 나의 습관들은 대체로 물성이 없고 정해진 법칙도 없으며 그저 살아가면서 조율하고 스스로 깨닫고 상황과 사람과 여건에 맞게 행동하면 된다는 아주 당연한 이치를 앞에두고 두 걸음 쯤 뒤쳐진 채 걷고 있었다.
여전히 나는 그 속도로 걷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