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타칭 문과형 머리.
그렇다고 딱히 문과형 분야를 뛰어나게 잘 하는지도 모르겠다. 단지 수학, 과학으로 분류되는 분야에 대한 이해가 워낙 낮기에 어쩔 수 없이 문과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 그저 잘 자란 성인들이 할 수 있는 일상적인 것들을 흉내라도 낼 수 있으려면 문과형 사람으로 살 수 밖에 없었다. 그저 누군가에게 망신 당하지 않을 정도만 될 수 있다면 바랄게 없었다. 물론 사람을 딱 두부류로 나눌 수는 없겠지만 나는 어쩐지 두 부류 중 하나로 극명하게 갈리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실을 이십 년 전에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내가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막상 시작하면 교양정도로는 습득할 수 있지..'라는 오만방자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 한줄기 희망이 자존감을 지켜주던 마지막 도미노 조각이나 다름 없었다. 즐길 줄 아는 만큼 해야 교양이고 취미일 텐데 그때만 해도 '즐긴다'는 말의 의미를 '쉬엄쉬엄 대충대충'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보통'으로 살며 '즐기려는 경지'에 이르기 위해 얼마나 어려운 가시밭길이 있을지는 그땐 너무 젊어서 몰랐다.
스무 살 즈음의 일이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혼자서 교보문고에 갔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 몇없는 찰나의 여유중 하나다. 그때는 이미 철학과 진학이 확정된 상황이었기에 입학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담쌓고 살던 과학, 미술교양도서를 읽으며 부족한 점을 메꾸고 싶었다. 하지만 내지, 내용은 커녕 목차도 훑어보지 않았다. 어디가 부족한지 모르니 뭐라도 빈 독에 부어보자 하는 마음. 그때도 시늉을 내고 싶은 허세는 숨기지 못했던 듯 하다.
'내가 이런 분야도 깊고 해박한 지식은 아니더라도 얕게나마 알고 있어.'라는 자신감을 갖고 싶었던 오히려 마음은 텅 비었던 시절.
'팔자에 없는'이라는 말을 최근에 자주 떠올렸다.
몇주 뒤 나는 마흔이 된다. 단명하지 않는다면 인생의 절반은 살았다. 엄마로서 삶을 사는 나는 자녀교육에 열을 쏟는 엄마는 아니다. 그래서 사고력,창의력,집중력에 좋다는 무언가를 들어는 봤어도 아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시키지는 않았다.
또 한가지. 나는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사주팔자는 어느정도 믿는다. 그러니까 어느 쪽 분야에 재능이 있다고 말하는 것들. 대략은 맞는다고 생각한다. 미신보다는 학문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깊게는 모르지만 사주명리학은 확률게임에서 압도적 데이터를 자랑할 거라고 믿는다.
여담이지만 어디서 사주팔자를 본적이 있는데 나에겐 '문창귀인'이 있단다. 그래서 글쓰고 누군가를 가르치는것에 재능이 있단다. 그이야기를 들으니 사주에 대한 신뢰도가 팍 꺾이긴 하지만 확실한건 사주에도 나온 '이과'형 머리는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마흔을 앞두고 나는 그야말로 팔자에도 없는 바둑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내가 가고 싶은 글쓰기 분야로 아직은 실력을 쌓아야 하고 이렇다 할 진취적 계획은 없고 있다한들 준비단계에 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아이들입에 풀칠하고 원하는 학용품정도 사줄 수 있는 푼돈은 쥐고 있어야 했다. 십 년 넘게 일하며 살았던 사람이다 보니 그 바깥세상이 괴롭고 힘들어 내 자신이 다시 구석으로 내팽개쳐졌다한들 바깥자체가 싫은 건 아니었다. 콧바람은 쐬어야 하고 딱 아이들 간식비 벌 돈이 필요해 선택한 아르바이트.
바둑학원 행정보조였다. 말이 행정보조지 바둑에 문외한인 내게 긴장의 연속이었다. 주 3회, 일 5시간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었고 행정을 보조하는 사무형 인간이라 한들 바둑에 대한 역사, 지식, 기본은 알아야 했다. 알지 않으면 어떤 문서도 쓸 수 없다. 그렇게 마치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을 떠올리며 어깨 너머로 찾아보고 어린이 교재도 풀어본지 4개월이 되어간다.
나는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어린이 바둑교재인데 성인인 내게 모를 수가 있을까? 어려우면 얼마나 어렵겠어? 내가 유단자가 되려는 것도 아닌데 기초를 위한 기초공부잖아. 괜찮을거야.'
교재는 글씨, 글씨는 글, 글을 파악하면 이해 안 될게 어디 있겠는가 싶었는데 바로 여기 있었다. 교재내용과 내 머리,손가락은 따로 놀았다. 정말이지 교재를 7권까지 완료했는데 바둑은 성인입문완료인 18급 근처에도 못 가고 있다. 어린이 바둑교육 어플을 다운로드해 가며 열심히 AI바둑을 두고 있지만 공인급수도 아닌 어플상에서의 20급까지 오는데만 한 달이 넘게 걸렸다. 4개월간 성인입문기초 근처에도 못 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바둑은 내가 고이고이 잘 숨겨두고 눌러 담아둔 콤플렉스를 건드리다 못해 잘근잘근 씹어대기 시작했다.
'나 바본가. 나 경계선 지능인가.
바둑판 위에 다음, 다음 수도 그려지지 않는다.
2선급소니 옥집이니 하는 것들은 그냥 자음모음 결합일 뿐, 내 머릿속 아니 19줄도 아닌 13줄 바둑판에서도 그려지지 않았다.
그나마 할 줄 아는 게 호구, 양호구인데 그마저도 바둑판 위에서도 인생에서도 꼭 내가 호구가 된 것 만 같다. (그 호구가 그 호구인지는 모른다.)
팔자에 없는 바둑을 한다고 설치던 나는 결국 고등학교 때 아이큐검사결과를 담임교사에게 아득바득 우겨 듣고 온 엄마가 하루 내내 어두웠던 표정을 보며 눈치본 기억이 떠올랐다. 바둑이 나를 20년 전 기억까지 끄집어 내고야 말았다. 나야 바둑교사가 아니라 행정보조직원이니까 일하는 데는 상관없다. 하지만 나는 매일매일 학원에 출근하며 작아지는 나를 본다. 나와 똑같이 바둑에 대한 지식 없이 아이엄마로서 두 달 전 행정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한 분은 현재 AI로봇바둑 12급을 둔다. 나는 그보다 더 일찍 배우기 시작했지만 급수를 매길 수도 없는 위치에 서있다.
내가 공부를 덜해서가 아니다. 시간도 투자했고 (일반인 기준) 교재도 계속해서 들여다본다. 유튜브 강의도 둔다 기보도 외워본다. 하지만 그것도 바둑판 위에서는 따로 논다. 나는 여전히 '호구'갱신 중이다. 어떻게 새로운 모습의 호구가 될까 연구하는 사람 같다.
바둑판위에 돌을 올려두다보면 책에서 접한 내용이 하나씩 지워진다. 죽지 않으려면 떨어진 두집을 지으라는 그 기본적인 원리도 생각이 안난다. 오늘은 호구에 꽂히고 내일은 떨어진 두집에 꽂히고 다음날은 끊기에 꽂힌다. 결합할 줄 모른다. 하루에 하나만 꽂혀 그 방법만으로 바둑을 둔다. 어떤 날은 정말 내 뇌에 문제가 있는건 아닌가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도 한다. 이십년전의 느꼈던 나의 잔상이 사실인것만 같아서.
이세돌, 이창호, 조훈현 국수와 같은 분들은 내겐 언감생심 천재이자 위인 같은 사람들이다. 나는 그저 활로, 단수, 행마만 알면 머릿속에 원리대로 착착 그려지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바둑은 배우면 배울수록 나를 바보로 만든다. 보통 노력하면 부족할 지언정 안되는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해도해도 안되는걸 찾았다. 이것도 능력인가.
4개월간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중 학원 원장님께 조심스레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받은 처방은 학원에 있는 13줄 Ai로봇바둑을 많이 둬보는 것. 교재나 영상자료는 중요치 않으니 계속해서 끊임없이 둬봐야 한다고. 원장님도 내가 13줄 1단계에서 계속해서 헤매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하셨던 것 같다. 이제보니 바둑알 따내기 3단계가 내 최고 실력이자 기력인 셈이다.
이상한 고집은 나를 계속해서 그곳에 있게 만든다. 나를 작아지게 만드는, 포기하게 만드는 학원에 계속 근무를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무보조는 사무보조일 뿐, 푼돈 벌자고 간 건데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냐는 마음으로 계속 있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과 바둑은 전혀 반대야.
이번에도 못한다고 또 포기하면 너무 비겁해.
바둑을 두며 거친 내 성격만 확인하고 있다.
바둑을 두며 낮은 내 지능을 재확인하고 있다.
역시 난 안된다는 부정적인 생각만 든다.
하지만 재미가 없진 않다. '
이 생각은 나이든 바둑 꿈나무의 성장스토리가 아니라 단지 어플바둑게임에 중독된 사람의 이야기인지에 그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