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아내의 결혼생활 적응기
2020. 08. 17.
"다음주 아버님 생신이라서 시가 다녀와야 해~"
"아, 첫 생신이면 네가 차려드려?"
"잉? 나 똥손인데~ 차려드려야 해?"
"시부모님 첫생신은 며느리가 차려드려야 한다고..."
친구랑 약속 잡기 위해 대화 하다 몰랐던 구전소설을 알게되었다.
조선시대 어느 산골 자락에서 정한 법칙인가?
대체 누가 만들어 낸 건지 어느 구전으로 내려오는 건지 “며느리가 해야 하는 101가지 리스트"라도 있는 것 같다.
결혼 전, 나는 흔히들 말하는 시월드 혹은 시가를 우리 엄마 아빠와 다르지 않게 생각하여
함께 놀러도 다니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시어머니와 둘이 쇼핑도 하고
커피도 마시러 다니겠다는 로망을 품고 결혼한, 아주 깜찍한 생각을 했던 1인이다.
놀랍지 않게도 그 깜찍한 생각은 정확히 6개월 동안만 유지되었으며,
지금은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어려울 수밖에 없는 관계임을 명백히 인정하는 바이다.
(놀랍게도 나의 시어머니는 배려 넘치시고, 시가에 가도 손에 물한방울 묻히지 않게 항상 쉬라고 해주시는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묘하고 미묘한 심리적 어려움이랄까 거리감이랄까..)
나는 우리 집에서만은 온실 속의 화초로 자란 아주 버릇없고 제멋대로인 여자이다.
아빠는 아직도 "쟤는 너무 오냐오냐 키워가지구~ 걱정이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신다.
뭐 어쩌겠나. 이미 이렇게 훌쩍 커버린걸.
나의 성장 배경 탓인지는 몰라도 아무리 생각해도 며느리라는 역할은 내가 생각할 때
아주 부당한 역할뿐이다. 잘해야 본전이다.라는 말은 딱 며느리에게 어울리는 수식어라 생각한다.
시가에 가서 설거지나 음식을 할 때 돕지 않는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잘 만난 것이고,
처가에 가서 설거지나 음식을 돕지 않는 사위는 당연한 것이다.
명절이면 시가에 먼저 가서 차례를 지내고다저녁때가 되어서 친정집에 도착한다.
딸만 있고, 며느리는 없는 우리 엄마가 너무 불쌍할 따름인데, 나보다 윗세대를 살아온 엄마는 불평은커녕
명절이니 시댁에 가서 잘하고 엄마아빠댁엔 나중에 와도 된단다.화나.
엄마가 나를 낳고 여자라는 이유로 혹은 남자라는 이유로 날 덜 가르치려 했거나 더 가르치려 했거나
딸 또는 아들이란 호칭에 의해 우리를 다르게 키웠을까? 아들 딸 구분 없이 잘 키워주셔 놓고!
왜 딸 가진 죄인의 마인드가 우리 엄마에게도 남아 있는 것일까.
엄마 딸이 집에서나 그랬지 나가면 생각보다 잘 났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여성의 사회활동은 점차 당연시해지고 있다.
여성의 근속연수는 늘어가고, 남성의 육아휴직이 조금씩 자유로워지는 분위기 속에서 점점 더 차이는 있어도
차별은 없는 세상을 살아가게 되고 있다 생각했는데,
요리에 자신이 있지는 않지만, 까짓 거 성심성의껏 온 맘을 다해 생신상쯤이야 차려 드릴 수 있다. 얼마든지.
그런데 왜 내 마음에 우러나서가 아니라 “그런다고들 하더라."라는 출처도 이유도 모르는 법칙을 듣고
따라야 하는 것인가.
얼마 전 장인어른의 생신 때 내 남편은 앉아서 생신 축하드린다며 식사만 함께 했음에도 너무 예쁜 사위인데 말이다.
남편과 내가 남녀의 역할을 나누지 않고 두 손 잡고 빚내어 가정을 꾸리고 함께 으쌰 으쌰 힘내서 빚 갚는
재미도 알아가며 알콩달콩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우리 가정에 그 누구도 며느리와 사위라는 프레임을 씌워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가 더 잘 났고 못났고 없이 서로의 부족함을 서로가 채워주며 결혼 생활하고 있는
우리는 서로의 부모님께 그저 "내 자식의 좋은 짝, 혹은 배우자" 정도로만 서로가 생각되길 바란다.
그게 안된다면, 여전히 어렵다면. 나도 사위하고 싶다.
배우자의 부모님 댁에 가서 "제가 뭐 도울까요? 과일이라도 깎을까요?"라는 말을 건네지 않아도
예쁨 받을 수 있는 사위하고 싶다.
아직 세상이 변하려면 갈 길이 머니 난 그냥 사위 해야겠다. 오빠가 며느리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