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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어 여경 Sep 18. 2021

<short>부장님의 명품백

품위에 대하여



오래 전.

이상하리만치 추웠던 어느 봄날의 일기.




#1


나는 부장님을 존경한다.

부장님은 명품백이 여러개다.

그것 때문에 부장님을 존경하는 건 아니지만,

세금으로 월급받는 사람들은

겉으로 소박해보여야 한다는,

그 흔한 편견을 과감히 깨시는 분을 처음 봐서

내겐 퍽 매력적이었다.



나는 부장님을 존경한다.

부장님은 외제차를 탄다.

그것 때문에 부장님을 존경하는 건 아니지만,

나이에 걸맞는 리더십을 갖추었으면서

그만한 품위를 겉으로 드러내는 일에 거침없는 분이라 퍽 간지나 보였다.




그 분의 리더십은 낮은 곳부터 흘러간다.

비슷한 또래의 부장님들이나 과장님들보다,

말단 신입들과

더 자주 대화하고 허물없이 지내셨다.

어쩜 그렇게 나이 직위 불문하고 직원들과 잘 지내시는지,

나도 직장을 오래 다니다 보면 저런 소통의 달인이 될 수 있을까 흠모하게 되었다.


그 분의 리더십은 헌신적이다.

직원들 부재시 네 일 내 일 가리지 않고

기꺼이 솔선수범해주시는 올라운드 플레이어.

나같이 업무를 개뿔 모르는 막내에게도

“난 너한테 배우려고” 라며 맑게 웃으신다.

그런 날은 미친듯이 업무 지침과 여러 보고서를

파며 그 분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나를 발견한다.

결국 그 모든 건 부하 직원의 재산이 된다.





하지만 그런 부장님이 엄격해지는 순간이 있다.


원칙과 기한을 명확히 지키지 않았을 때.

권위에 굴복하여

자신의 의견을 명확하게 내지 못할 때.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일을 해결하려는 노력'보다 '무작정 사과만' 하며 고개를 조아릴 때.

나는 그 분 덕에 내가 고개를 숙여야 할 때와 숙이지 말아야 할 때를 익혔다.




온몸에서 배어나오는 그 양날의 품위는 대체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그 분을 미치도록 닮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부장님을 관찰했고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좋아. 나도 명품백을 사보자.”



..


..




어쩌다가 그런 결론에 도달했었는지 모르지만

그 분을 핑계삼아

생애 처음 명품백을 사봤다.

처음으로 명품관에서 번호표를 뽑아 대기를 해봤고

집착적으로 옆에 붙어 친절하게 케어하는

명품관 직원의 호의도 받아봤다.


명품백을 차면 나도 그분처럼 품위있어 보일 수 있을까? 하지만 역시나 아랫것의 명품백은 언밸런스와 어색함으로 이목을 끌 수밖에 없는지,

아니면 평소 촌스러운 나에겐 턱없이 어울리지 않은 튀는 색깔의 가방을 홧김에 산 탓인지,

옆팀 직원들까지 몰려와 주목을 받는 바람에

이후 회사에 도저히 들고가지 못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이
그렇게나 가져보고 싶던 그 가방이,
막상 내 것이 되고 나니
만족감을 크게 주지 못했고
우리 집 주상전하가 되어있었다.




가죽관리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흰 장갑으로 가방을 닦느라 쉴 시간이 줄었다.

어느 출근길.

빗길에 행여 가방에 물이 튈까봐 자동차가 지나가면

온몸으로 막는 나를 보며 자괴감이 밀려왔다.


<출처:신서유기>




이건 아니다. 난 이런 것을 원한 게 아니다. 내가 생각한 품위는 이런 게 아니다.





사람이 명품인 우리 부장님처럼 되려면

나도 나이가 들수록 그만한 태도와 생활 습관을 가지는 데 먼저 더 집중해야 맞는 것이었다.


경험해봐야 인정하는 나란 인간의 명품백은

몇달 째 고오급 상자에 고이 모셔진 채

서랍 속에 있고

카드할부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이렇게 절대 퇴사할 수 없는 이유를 미쳐 쌓아두는 나이, 서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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