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서 찾는 인간이해 #12>
서양 철학의 뿌리를 만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플라톤의『국가』를 펼치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예상치 못한 당혹감이다.
소크라테스와 주변 인물들의 대화 형식이라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곧 마침표가 어디 있는지 찾기 힘든 지독하게 긴 문장들과 난해한 논리에 가로막히기 때문이다.
반 페이지가 넘도록 끝나지 않는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철학이 왜 사유의 근육을 요구하는지 몸소 체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 긴 문장들을 인내하며 따라가다 보면,
플라톤이 이 방대한 대화를 통해 던지고 있는 질문은 의외로 단순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올바름(정의)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질문은 결국 한 가지 문제로 수렴된다.
인간은 왜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가?
국가의 초반부에는 ‘기게스의 반지’라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반지를 끼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투명 인간이 된다.
만약 그런 반지가 있다면 사람들은 여전히 올바르게 살까?
들키지 않는다면, 사람은 욕망을 따라 행동하지 않을까?
이 질문은 단순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도덕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의문을 건드린다.
우리가 올바르게 행동하는 이유는 정말로 올바름을 원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지 사회의 시선을 두려워하기 때문일까?
이 질문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분명하게 말한다.
올바름은 타인의 시선을 위한 장식이 아니라 영혼의 건강 상태 그 자체라고.
몸이 병들면 아무리 좋은 옷을 입어도 괴로운 것처럼,
영혼의 질서가 무너진 사람은 겉으로 아무리 성공한 삶을 살아도 내면의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국가는 '올바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설명하기 위해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을 그려낸다.
하지만 플라톤의 관심은 사실 국가 그 자체에 있지 않다.
한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올바름의 작용은 너무 작고 복잡해서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플라톤은 그것을 국가라는 거대한 구조로 확대해 보여준다.
국가라는 커다란 글씨로 올바름을 써 내려간 뒤,
그것을 다시 개인의 영혼에 대입해 읽어내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올바른 국가는 완벽한 제도를 가진 나라가 아니다.
통치자, 방위자, 생산자가 서로의 역할을 넘보지 않고 각자의 자리를 지킬 때 만들어지는 조화로운 질서다.
그리고 이 구조는 그대로 개인에게 적용된다.
우리 안의 이성이 중심이 되어 기개를 이끌고,
끊임없이 솟구치는 욕망을 다스릴 때 인간은 비로소 올바른 상태에 도달한다.
국가의 질서가 무너지는 이유가 각 계층의 침범이듯,
개인의 삶 역시 욕망이 이성의 자리를 차지할 때 무너지기 시작한다.
국가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동굴의 비유’다.
어둠 속 동굴에 묶여 벽에 비친 그림자를 세상의 전부라고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몸을 돌려 동굴 밖의 빛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눈이 부시고 고통스럽지만,
결국 그는 태양 아래의 세계가 진짜 현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가 다시 동굴로 돌아가 진실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비웃고 공격하려 한다.
플라톤에게 이것은 단순한 철학적 비유가 아니다.
올바름을 깨달은 인간이 감당해야 하는 책임과 고독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진실을 본 사람은 더 이상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올바름을 안다는 것은 지식을 얻는 일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독하게 긴 문장들과 복잡한 논의를 지나 우리가 도달하는 결론은 의외로 담백하다.
완벽한 공동체를 만드는 방법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나’라는 국가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가를 살피는 일이다.
내 안의 욕망이 이성을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지,
감정이 판단을 앞질러 삶의 질서를 흔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는 것.
플라톤이 말한 철인 왕은 어쩌면 외부의 통치자가 아니라,
내 삶의 주권을 잡고 있는 나 자신의 이성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의 국가를 경영한다.
그 국가의 이름은 ‘나’다.
그 국가가 정의로운 질서를 유지할지,
혹은 욕망과 충동이 지배하는 혼란 속으로 무너질지는
결국 단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
바로 나 자신의 올바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