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해외에서 돌아온 아빠는 더 이상 중동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아빠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한 동안은 먹고 살 돈을 벌었다고만 들었다. 오빠는 엄마가 하늘나라로 간 이후, 더 공부에 매진하는 듯 보였고 아빠는 할머니를 시골집으로 배웅하러 집을 비운 사이에 태호가 찾아왔다. 그때 까지도, 나는 태호가 나에게 어떤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저 졸업 앨범을 가져다주려고 찾아온 같은 반 친구 이자 마지막 졸업생 동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문을 열자, 태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영원히 안 할 기세였다.
“이거, 내꺼지?”
어색한 분위기에 아무 말이나 꺼냈다. 태호가 들고 있던 졸업 앨범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밖에 눈 오는데 봤어?”
“그러게. 눈이 오네”
태호는 무슨 할 말이 남은 듯 쭈뼛 쭈뼛 서 있었다. 졸업 앨범을 내게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님은 분명했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들어와서 주스 한 잔이라도 하고 가라고 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그런데 우리 집에는 맛있는 오렌지 주스도 없고, 더군다나 오빠가 집에 친구를 들이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잠깐 망설이고 있었던 찰나, 태호는 다짜고짜 내 팔목을 잡았다.
“우리 달리기 하자”
“지금?”
달리기를 하자는 말 보다, 남자가 내 팔목을 잡은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가슴이 살짝 콩닥 거리는 것을 느꼈다.
“잠깐만 기다려”
나는 방으로 달려가 목도리와 장갑, 겉 옷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나왔다. 오빠에게는 잠깐 친구 좀 만나고 온다고 했지만, 내 말이 들리지 않았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자, 눈은 내리고 있었지만 깊게 쌓인 정도는 아니라서 바닥이 미끌거리지는 않았다. 엄마 말고 다른 누군가와 정식으로 달리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 너 때문에 연습했다”
태호는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듯 보였다. 그래도 나는 태호를 이길 자신이 충분히 있었다. 이것은 단기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종의 지구력 같은 것이 내 안에 좋은 무기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일부러 져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찰나, 태호가 내기를 제안했다.
“이기는 사람이 떡볶이 쏘기. 어때?”
이렇게 된 이상 태호를 반드시 이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디까지 달릴까?”
“오두막까지 달리자”
“그렇게 멀리?”
태호가 가리킨 곳은 두두가 예전에 우유를 쏟았던 창고 옆에 있는 작은 오두막이었다.
“오케이”
태호는 본인이 조금 더 뒤에서 출발하겠다고 한 것을 내가 그렇게 하면 불공평하다며 말렸다. 무슨 자신감 인지, 태호는 나에게 양보까지 하면서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한 것이 조금은 우스워 보였다. 내가 신호를 주기로 하고는 우리 둘 다 출발점에서 나란히 서 있었다.
“레디, 땅!”
출발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억눌러 있었던 슬픔이 터지듯이 위로 올라오는 것을 감지했다. 눈물을 감추려고 눈을 질끈 감아도 소용없었다. 엄마와 다시는 달리기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태호는 저만큼 멀어져 가고 있었다. 내가 복잡한 감정에 제대로 뛰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자 태호는 멈춰 서서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나는 뛰는 것인지 걷는 것인지 모를 속도로 엉금엉금 기어가듯이 다가갔다. 태호에게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고 말하려고 하던 찰나, 태호가 내 팔목을 힘껏 잡았다.
“너, 그냥 나 따라와!”
마르고 작기만 했던 태호가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날만큼은 매우 강하고 좋은 에너지가 그의 몸에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아무 생각 없이 태호가 이끄는 대로 달렸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가 가는 방향으로 다리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태호가 내 팔목을 잡고 뛰고 있었을 뿐인데도 누군가 나를 번쩍 끌어안고 달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곧이어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태호가 어떤 아이이든 간에, 지금 내 가슴은 이미 쉴 새 없이 뛰고 있었다. 오랜만에 엄마와 달리기를 했을 때처럼 행복했다. 태호는 나를 데리고 달리면서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앞만 보고 계속 달리고 있었다. 태호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나도 숨이 차오르고 있었다. 눈물인 지 콧물 인지, 물 같은 것들이 얼굴에 범벅되고는 있었지만 동시에 마음은 시원했다. 그때 처음으로 엄마가 왜 그토록 달리기를 좋아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무거운 마음들이 모조리 수증기가 되어 날아가는 기분을 느꼈다. 몸 구석구석에 잠자고 있었던 근육들이 계속 움직이면서 나쁜 독소 같은 것들을 뱉어내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 나쁜 독소는 나를 자책하는 감정들이었다. 엄마가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었을 때처럼,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오두막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아쉬움이 밀려왔다. 태호와 더 달리고 싶었다. 아니, 영원히 달리고 싶어 졌다.
그 이후, 나는 달리기를 더 좋아하게 되었고, 중학교 때는 각종 육상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냈다. 나는 아무것도 잘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달리기는 유일한 나의 해방구이자 전부가 되었다. 달릴 때마다 엄마와 태호 생각을 했다. 엄마는 내 앞에서 힘차게 달리고 있었고, 태호는 내 곁에 나란히 붙어서 나의 속도에 맞춰 달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에겐 앞에서 끌어주는 사람과 옆에서 다독여주는 사람이 존재했다. 두두와 나, 태호는 초등학교 졸업 이후에도 종종 만나 오두막에 모여 컵라면을 먹었다. 그러나 그때 교실에서 먹었던 컵라면의 맛은 나지 않았다. 서로 다른 중학교에 진학한 뒤로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그러다 기적처럼 올해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우리 셋은 다시 재회하게 되었다.
골동품 할머니를 알게 된 것은 아빠가 장사를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하루 5분 소설
3화에서 계속(최종)
글 여미
그림 여미
yeoulhan@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