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이 세상을,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이 공간을, 나에게 주어진 일들, 앞으로 해야 하는 업무들, 거슬리는 복잡한 내 마음들, 답답한 회사.... 아무도 모르는 곳에 도망쳐서 아무도 모르는 일을 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참고 견디고 이겨내고, 싫어도 해야 하는 일들을 묵묵히 하고, 조금 당황스러운 일이 생겨도 오늘 수고했다 말하고, 그렇게 격려하고 다독여줘도 도망가고 싶은 거 건 도망가고 싶은 거다. 보기 싫은 옷가지들을 옷장에 구겨 넣는 것처럼, 그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나의 회피 생활
"나, 게임하고 싶어"
초등학교 이후로 게임을 거의 해보지 않은 나는, 펭귄(남자 친구)에게 말했다. 게임을 좋아하고 게임을 즐겨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웠다. 펭귄(남자 친구)도 버섯 캐릭터가 사냥하는 게임을 즐겨하는데, 그 시간만큼은 몰입하고 행복해 보이기도 하고, 내가 현재 고민하는 일들에 잠시 벗어나서 새롭고 통통 튀는 세계에 소풍 와있는 기분이 들 것만 같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직까지 직접적으로 게임을 찾아본다던가, 다운로드하여서 해본다던가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도대체 왜?). 와, 나 진짜 게임에 관심이 없나?
사실 내가 어떤 초딩이었냐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친구와 PC방에서 하루 종일 컵라면만 먹으면서 게임만 하던 초딩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게임은 퀴즈 게임, 그리고 캐릭터 아이템을 사고파는 아무 의미 없는 캐릭터 옷 입히기 게임이었는데, 진짜 미친 듯이 했다. 초등시절을 그렇게 피시방에서 보냈는데, 어쩌다 중학교에 들어가고나서부터는 게임에 손도 대지 않고 있다. 성인이 돼서, 심지어 서른이 넘어 이제 다시 게임을 하고 싶다니. 그리고 그 원인이 그냥 현실 도피용이라니.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에겐 다른 도피처가 따로 있었다.
책이나 봐
요즘 '어쩔 티이(어쩌라고, 가서 티비나 봐)'와 '저쩔티비(반사)'같은 인터넷 신조어 유행인데, 나는 사실 티비도 별로 안 보기도 해서, 누가 나한테 '어쩌라고 티브이나 봐'라고 하는 것보다는 '어쩌라고 책이나 봐'라고 해주면 참 고마울 것 같다. '어 그래! 그거 좋다, 책이나 봐야겠다!' 라면서 당장 침대 위로 달려가 아이패드를 켜고 전자책을 볼 것만 같다. 그 정도로 책으로부터 힐링을 하는 편인데, 사실 책을 좋아하는 것보다는 '혹시 현실 도피 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올해부터 굉장한 목표와 계획을 세웠는데, 사실 '언젠가 이루겠다'라는 생각만 하고 있지, 하나도 실천하는 게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무엇을 해야겠다'라는 생각만 하면 곧이어 '어, 어쩌라고 책이나 봐야겠다'라고 현실에서 빠져나와 책의 세계로 뛰어든다. 책을 펼칠 때만큼은 현재의 고민이나, 불안, 미래에 대한 생각들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너무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 맞는 도피는 게임도 아니고, 운동도 아니고, 만남도 아니고, 여행도 아니었다. '이직 알아봐야지?'하고 책을 펼치고, '글을 써야지?' 하면 책을 펼치고, '인스타에 그림 올려야지?' 하면 책을 펼친다. 와, 진짜 힐링되고 행복하다. 나의 회피 생활은, 이 세상에 모든 책이 사라지는 그 순간에, 종료가 되지 않을까.
꿈? 돈? 직장? 자기 계발?
어쩌라고, 책이나 봐야겠다.
yeoulhan@nate.com
글 여미
그림 여미
인스타툰 시작했어요! 보러 오세요~~ @yeomi_wri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