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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미 Mar 05. 2018

울면서도 한걸음 씩

나는 울면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불치병을 앓고 있다.  


말 그대로 평생 고칠 수 없다. 앓는다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아직 까지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고, 아프지도 않다. 또한 이 병이 현재의 일상생활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그러다 보니 수십 년 동안 나조차도 병명을 제대로 기억해낸 적이 없다. 가족도, 친구들도 내가 아프다는 것을 자주 잊어버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기능은 점점 쇠약해져가고 있다. 하루에 두 알, 손톱만 한 약을 매일 먹는다. 


이 약은 병의 악화를 늦추기만 할 뿐, 그 이상의 효과는 없다. 분명한 것은 언젠가 큰 고통이 따를 것이며 장기 하나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병명이 생각나지 않을 때마다 인터넷 검색을 한다. 나는 이 병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나의 지독한 무관심에 괜한 후회와 죄책감이 밀려왔다. 무슨 약을 그리 먹느냐고 누군가 물어보면 그저 신장이 안 좋다고만 한다. 초등학교 때 처음 발견되어 큰 병원으로 보내졌다. 흰색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서 토론을 했고, 기다란 막대기로 내 배를 관통하였으며, 한 달 동안 병원에 갇혀 지냈다.  


그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는 내 안에 수십 년째 잠들어 있다. 투명한 형체의 그는 큰 공간을 차지한 채 내부의 흐름을 방해한다.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고,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가 없다. 아무런 권한과 권리도 없으면서 내 몸안에 찰싹 붙은 채 떨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동안 복용한 약의 부작용 때문인지 나의 육체는 늘 병들어있었다. 무얼 해도 무기력했고, 잔병을 달고 살았다. 학창 시절 내내 심하게 위염을 앓았다. 목과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서 음식을 먹거나 약을 먹으면 바로 토했다. 하루하루 불행의 나날들로 보냈다. 아픈 것 때문에 우울한 것이 아니었다. 그림 그리는 것도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을 하지 못했고, 전부 억압받았다.  


방에 틀어박혀서 매일 울었다. 고등학교 때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감독이 꿈이었다. 그 꿈은 병으로 인해 처참하게 짓밟혔다. 내 육체와 정신이 행복하지 않으니, 무얼 한들 의미가 없었다. 새로운 세계에 뛰어들 용기와 기쁨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도 가기 싫었다. 그렇게 아무도 만나지 않고, 먹지도 않고, 울며 지내다가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 나의 괴로운 상태, 고통스러운 감정을 어떤 형태로든 해소하고 싶은 마음에 다시 연필을 잡았다. 이전처럼 밝고 유쾌한 그림들을 그리지는 못했지만, 나름 고통이 완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구원해줄까? 


아무도 없었다. 가족도, 친구들도, 심지어 의사도 나를 일으켜주지 않는다. 그들의 걱정과 염려는 감사하지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병과 결별하기로 스스로 선언했다. 


너는 너대로 숨 쉬며 살아가거라,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가리라. 


처음으로 방을 너머 집 밖으로 나왔다. 눈물을 머금고 걸었다. 조금 더 빠르게 걸어보기도 하고, 뛰어도 보았다. 그렇게 1시간 동안 운동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여전히 배는 아팠고, 가슴은 답답했지만 그동안 먹고 싶은 것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먹었으며 친구들도 만나며 하루를 보냈다.  


늘 병에 연연하며 살아왔다. 


조금만 아파도 온갖 걱정과 신경을 쏟아부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병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의 존재를 잊으려고 노력했고, 나의 삶에 전념했다. 그리고 언젠가 나아질 것이라고 확신하고 또 확신했다. 아프고 병든, 나의 괴로운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 그림으로 포트폴리오를 완성하였고, 믿을 수 없었지만 대학에 합격했다. 대학에 가서도 병은 지속되었지만, 이전처럼 나약한 내가 아니었다. 그는 내 안에 잠들어 있었지만, 나의 삶까지 관여할 수는 없다며 명백한 타인이라는 것을 스스로 되뇌었다. 그렇게 수많은 시간이 흘렀고, 놀랍게도 원인 모를 위병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배도 아프지 않았고, 음식도 자유롭게 먹을 수 있었으며, 더 이상 우울하지 않았다.  


하나의 잔병을 떠나보내지만 아직도 나에게 남은 불치병이라는, 큰 병이 있지 않은가. 내 삶에서 이 병은 아무리 무시하려고 해도 떼어낼 수는 없다. 그와 나는 한 몸이 되어 죽을 때까지 고군분투하며 지내다가 함께 병들어갈 것이다. 그가 이제는 밉지 않다. 


울면서 매일 걷는다

글/그림 여미

yeoulhan@nate.com

커버사진 임경복


여미의 인스타그램 ID : yeomi_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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