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기욤 뮈소 장편 & 나의 여름방학 이야기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기욤 뮈소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것들을 지나친다. 지나침의 대상은 사랑하던 사람이나 애착하던 물건, 또는 인생에서 포착할 만한 순간일 수도 있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지나침은 필연적으로 그리움을 낳는다. 지나친 것을 ‘지나쳤다’ 라고 자각하는 것 자체로 이미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리움은 회귀본능을 자극한다. 회귀본능은 기욤 뮈소의 소설 속 엘리엇이 아니라면 해소가 불가능하기에, 현실세계의 해소되지 않은 본능에는 ‘향수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향수(鄕愁)’가 ‘병’이 된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지나친다는 것과 그리워한다는 것은 그다지 긍정적인 감정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나친 것에 대한 그리움을 마주할 때 황홀의 미소를 짓는 사람이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어떤 여인은 자신이 그리워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면 불콰해진 얼굴로 기억을 음미하듯 눈을 살포시 감은 채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행복해한다.
누군가에게는 그리움이 행복일 수도 있다. 엘리엇은 이 사실을 모른 채 살았던 것이다. 그 여인의 그리움에는 엘리엇의 그것과는 달리 미련이 없었다. 충분하고 솔직하게 온 마음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 짧은 서평, 그 비밀스러운 뒷 이야기.
위 글에서 칭하는 ‘그 여인’은 책 속의 주인공이 아니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알게 된 50대 여성이다. 성함은 이 명 훈 이시고, 대한민국의 무형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창 농악을 발굴하고 보존하기 위해 온 생애를 던져 힘쓰신 분이다. 기욤 뮈소가 쓴 글의 주인공은 엘리엇일지 몰라도, 내가 쓴 글의 주인공은 이명훈 선생님이다. 감히 주제넘게 그녀에 대해 말하고 싶어 이렇게 글을 쓴다.
지난 8월 셋째 주, 과 동아리 활동의 일환으로 전라북도 고창에서 일주일 간 머물며 농악을 배웠다. 농악이란 마을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꽹과리, 장구, 북, 소고 등의 악기를 연주하며 단체 행진 혹은 연극을 펼치는 민족 예술이다. 나는 농악에 쓰이는 악기 중에서 소고를 담당했다. 체감상 다른 악기에 비해 신체 활동량이 3배는 많은 소고를 악기 크기가 작아 쉬워 보인다는 이유로 선택한 과거의 나 자신과, 새벽 2시에 취침하고 아침 7시즈음 일어나 저녁 10시까지 농악을 배우고 판 굿을 뛰는 살인적인 스케줄. 그것들 덕분에 이튿날까지는 정말 죽을 만큼 힘들었다. 하지만 바닥난 체력보다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내 삶에 끼어들 틈이 전혀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던 ‘풍물’이라는 장르에 나의 작고 소중한 스물의 여름 중 일부 -심지어 꽤나 긴 시간- 을 태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앞으로 나는 풍물을 업으로 삼을 사람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진심을 다해 열심히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시간에 다른 생산적인 일들을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하는 오만한 생각 속에서 꽤나 괴로워했다. 그럼에도 자의적 선택에 대한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나 스스로에게 느끼는 환멸감과 열심히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나머지 50명의 청춘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배우고, 뛰었다. 나오라는 온수는 나오지 않고 화날 만큼 무해한 눈으로 벌거벗은 나를 쳐다보는 개구리가 튀어나오는 샤워실과, 제대로 설거지 되지 않은 그릇들에 붙어 있는 고춧가루가 나를 아무리 어이없게 하더라도.
이렇게 사흘간 고창에 온 것을 후회하며 속으로 곪고 있던 와중, ‘굿 이야기’라는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고창농악보존회장 이명훈 선생님께서 고창 농악의 역사를 간략히 설명해주시는 시간이었다. 처음엔 ‘뻔하디 뻔한 옛날 이야기나 늘어 놓겠거니’ 하며 반신반의한 상태로 멍하니 ‘그 여인’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고창 농악의 역사를 설명한다’ 라기보다는, 자신이 사랑하는 무언가를 전달해주는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동자에 반해버려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를 전해 듣던 그 영광의 순간 중에서 앙금처럼 내 마음에 가라앉아 눌러 붙어버린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미소였다. 그녀는 농악을 가르쳐 주신 스승님에 대한 추억을 말하던 도중, 자신의 앞에 둘러 앉아있는 100개의 눈동자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눈을 지긋이 감고 미소를 머금은 채로 약 3초가량 그 추억을 음미했다. 그 짧은 찰나에 나는 그녀가 스승님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느꼈다. 어쩌면 나의 느낌이 틀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곁에 없는 누군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필연적으로 그리움을 낳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리고 이내 의아했다. 줄곧 나는 그리움은 슬픔을 동반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해왔으나, 그녀가 머금고 있던 미소에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련함이나 세상을 떠난 사람에 대한 동정 따위 없이 순수한 행복만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미소가 그리움과 행복을 동시에 머금을 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도
그녀의 몸 속에 그녀가 그리워하는 무언가가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스승님으로부터 농악을 배운 그 시간들 중 1분 1초도 헛되게 보낸 순간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모든 순간이 모이고 고여서 그녀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 만족할 만큼 충분하고 솔직하게 온 마음으로 농악과 스승님을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랑으로 스승의 뒤를 이어 새파란 청춘들 앞에서 미련 없이 그것들을 그리워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일화를 기욤 뮈소의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와 연관지어 쓴 까닭은 ‘시간여행’이라는 소재에서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추출해냈기 때문이다.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엘리엇은 자신에게 빚진 노인에게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냐는 질문을 받게 되고, 30년 전에 죽은 한 여인이 그립다고 말한다. 이윽고 노인은 엘리엇에게 신묘한 힘을 가진 알약을 선물한다. 만약 그 때, 엘리엇이 그리움이 행복일 수도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이 소설은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다.
서평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리움이 행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농악을 배우면서 얻은 전달하고 싶은 것이 또 있다. 바로 ‘목표 없이 흘리는 땀의 가치’ 다. 앞서 말했듯 나는 이명훈 선생님의 굿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농악을 업으로 삼을 사람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회의에 빠져 있었다. 이명훈 선생님의 미소를 본 뒤에도 다양한 경험을 한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차원에서 고창에 온 것에 대한 후회는 거두었지만, 여전히 ‘이렇게까지’에 대한 의문은 남아있었다. (어쩌면 체력적으로 버티지 못해서 이런 생각이 든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의문의 해소를 도와주신 분은 소고반을 지도해주신 임성준 사부님이다. 사부님께서는 철학적인 질문을 많이 하셨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춤이 뭐냐?” 라는 질문이다. 사부님은 춤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듣고자 질문하신 것이 아니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지금 배우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목표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고자 함이었다. 사부님을 예시를 들어 부연 설명을 해주셨다.
“니들이 전공 수업에서 듣는 게 뭔지도 모르고 가만히 앉아서 받아 적기만 하고 있으면 남는 건
아무것도 없어. 성적은 또 어때? 잘 나오디?”
이 때 나는 깊이 깨달았다. 농악은 내 삶의 목표도 아니요, 종착역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고 있는 이유는 사부님의 철학을 듣기 위함이었구나. 농악이 되었든 다른 일이 되었든 한 가지를 ‘이렇게까지’ 열심히 해 본 스승의 견식을 주워 가기 위함이었구나.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주인공 토마시를 내세워 인생은 리허설 없는 연극이라고 주장했다. 아니, 그는 틀렸어. 내 인생에는 리허설이 있다. 나는 고창에서 무언가를 ‘이렇게까지’ 열심히 해 볼 수 있는 리허설을 한 것이다.
(농악에 목표가 없었기에 리허설이 될 수 있었음을.)
목표 없이 땀을 흘리는 것은 그 자체로 목표가 될 수 있다. 목표도 목적도 없이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열정적으로 사랑해 본 경험을 한 사람만이 가지는 풍족함으로 우리는 진짜 무대를 준비한다. 이제 나만의 작고 소중한 스물의 여름은 저문다. 고창에서의 추억으로 진짜 무대로 나아갈 시간이다. (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