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국어대학교 풍물패 38주년 대공연 후기
나는 올해로 스물 한 살이 되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소중하고 아름다운 스무 살이 지나가버렸다.
2025년 1월, 아직은 스무 살의 여운이 남은 지금, 영원히 잊고 싶지 않은 추억의 일부를 기록하려 한다.
작년 한 해 동안 겪었던 경험 중, 가슴에 가장 강렬하게 남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단연 '한나래'를 뽑고 싶다.
'한나래'를 향한 첫 걸음부터 대공연의 막을 내리기까지, 뜨겁게 작열하던 2024년의 나를 추억하며.
한나래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 위치한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학대학 소속 공연 학회로, 세계 유네스코 유산에 등재된 농악(풍물)을 전승하는 동아리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풍물패’라고 할 수 있다. 1987년에 창설되어 올해로 39주년을 맞이한 장수 동아리이기도 하다. 아마 많은 분들이 ‘풍물패’ 라고 하면 운동권 세력의 이미지를 많이 떠올리실 것 같은데, 1990년대까지는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풍물패는 정치와는 거리가 멀다. 그저 에너지 넘치는 대학생들끼리 모여 친목을 다지고 좋은 경험과 추억을 쌓는 동아리일 뿐이다.
한나래를 비롯한 풍물패가 다른 동아리들과 특별히 다른 점이 있다면, 동아리 생활 2년이 경과하면 ‘졸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구조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동아리 가입 첫 1년 동안은 새내기로서 농악에 대해 1부터 10까지 배운다. 그리고 1년 간의 활동을 마무리하는 대공연에 새내기로서 참여한다. 이듬해부터는 ‘주체’가 되어 새로 들어온 신입 부원들을 가르치고, 대공연을 기획하여 준비한다. 즉, 선배가 되는 해에 자신의 공연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공연을 무대에 올리면, '졸업'을 함으로써 아쉬움을 뒤로 하고 풍물이 없던 일상생활로 돌아간다.
대공연을 마친 소감을 쓰기에 앞서 구구절절 서론을 펼치려 한다.
내가 풍물을 한다고 했을 때 나를 알던 주위 대부분의 사람들이 놀랐다. “너가?” “웬 풍물?” “밴드부 같은 거나 하지” 등등 다양한 반응들. 하지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던. 나는 이런 말들 따위에 상처 받지 않았다. 왜냐고? 나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엥 풍물?” “시간 낭비일 것 같은데” 이런 생각들을 했었더랬다. 나름 스스로가 개방적이라고 생각했던 어리석었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풍물은 무속적인 것, 뒤쳐진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지금의 내가 느끼기에는 종교적인 행위라기 보다는 전통 예술 쪽에 더 가깝다.) 누군가 영국의 밴드 Radio Head에서 유명한 노래 <Creep> 밖에 없지 않느냐고 놀리면 발작하면서도, 다른 마이너 장르에 대한 존중은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래서 나의 몇 없는(ㅠㅠ) 과 동기 희재언니가 같이 한나래 하자고 계속 조를 때 줄곧 거절해왔다. 무속도 무속이고, 관심도 없던 장르였고, 과 생활에 적극적인 성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람들 앞에 설 자신이 없었다. 한나래 사람들은 내가 조용한 성격이었다고 하면 다들 놀란다. 맹세코 나는 정말 내성적이고 조용했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딱히 절친이라 말 할만한 친구도 없었고, 내가 유일하게 감점 받았던 수행평가는 국어 발표 과제였다. 그렇게 계속 희재언니의 제안을 거절하다가, 아마 한 다섯 번째 부탁이었던 것 같다. 2024년 4월 2일 화요일, 날씨는 유독 좋았고 그날 따라 기분도 좋았다. 수업이 일찍 끝났는데, 왠지 그냥 집에 가기엔 아쉬웠다. 그래서 희재언니를 따라 쫄래쫄래 한나래 정기총회에 참석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한나래 부원이자 일본학대학 총학생회장을 담당하고 있는 전찬형 선배님께서는 노트북을 펼쳐두고, 그 옆에는 사전만큼 두꺼운 풍물 서적을 책상 위에 올려둔 채 내 앞에 앉아 있었다. 낯선 어른들 사이에서 부끄러워하는 5살 어린아이처럼 희재언니 옆에 딱 달라붙어 앉아서 긴장한 채로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데, 찬형 선배가 뒤돌아 보면서 말했다. ‘치배’는 악기 치는 사람을 말한다고, 그래서 쇠치배, 장구치배. 이런식으로 말하는 거라고. “앗 넵 감사합니다.” 하고 멋쩍게 웃었다. 그러자 찬형 선배는 대뜸 말을 놓으라고 했다. “으응…” 하고 답하고 난 후에도 몇 번 습관처럼 존댓말을 써버렸는데, 나중에는 존댓말 금지령을 받았다.
한나래 정기 총회를 했던 그 당일이었는지는 기억이 흐릿한데, 언젠가 한 번 풍물패 동아리방에 가서 악기 체험을 했었다. 내가 체험할 수 있는 악기는 쇠, 장구, 북, 소고. 이렇게 네가지가 있었고, 한 번씩 쳐보고 1년동안 배울 악기를 정하면 됐다. 처음에 쇠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맨 앞에 서서 가락을 주도해야 하니까 내가 저걸 할 일은 죽어도 없겠다 싶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년 한나래 쇠치배는 나다.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일까) 그리고 관심 있었던 것은 장구. 가락도 신나고, 양 손을 쓰는 게 재미있어 보였다. 그런데 선배들이 새내기 중에 장구치배가 너무 많다고 소곤대는 것을 들어버렸다. 이것도 결국 눈치 보여서 패스. (지금 생각해보면 하고 싶으면 하고 싶다고 밀어붙였어도 될 일이었다. 나의 소심한 성격을 보여주는 대목.) 다음으로 북은…. 체험하자마자 3초만에 포기하게 됐다. "포기했다"가 아니라, "포기되었다" 쪽이 맞다. 작년 수능이 끝난 겨울 방학에 잠시 헬스장에서 PT를 받았었는데, 그 당시 PT 선생님께서 팔굽혀펴기 하나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나를 보며 60대 아주머님들보다도 근력이 부족한 상태라고 했다. 그런 내가 들기에 북은 너무 무거웠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남은 악기는 소고였다. ‘오 나름 귀여운데?’ 싶은 악기였다. 그리고 쉬워 보였다. 인파 속에 묻어가기에도 좋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소고를 가르쳐 줄 소고치배 선배가 한나래에는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다른 풍물패 선배를 통해 어찌저찌 배우면 된다는 분위기에 소고를 선택했다. 선택했다기 보다는 4지선다 객관식에서 소거법으로 정답이 아닌 악기들을 지우면 남는 게 소고였달까.
소고를 가르쳐줄 사람이 없었다. 마치 오리들이 가득한 호수에서 백조의 새끼가 된 기분이었다. 선배들도 날 어찌해야할 지 모른 채 멀뚱멀뚱 어색하게 함께할 뿐이었다. 그 때 어디선가 혜성처럼 22학번 최윤아 선배님께서 등장하셨다. 최윤아 선배님께서는 휴학 중임에도 종종 학교에 나와 나에게 소고를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학번이 학번인지라 자주 보지는 못했고, 만날 때마다 어색했던 기억이 있다. 윤아 선배가 없는 날엔 다른 과 풍물패 새내기들이 소고 배우는데 어색하게 껴서 배우기도 했는데,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기만 하니 갈피를 못 잡았다. 그래서 처음엔 동아리에 그닥 정이 없었다. 일주일에 두 번이나 하는데 힘들기는 무지하게 힘들고 친목 활동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한 애정 없이 다녔다. 그렇다고 해도 딱히 미운 마음이 들지는 않기도 했고, 내가 한 선택에 책임은 져야 한다는 마음가짐, 그와 더불어 선배들이 종종 해주는 칭찬이 나를 포기하지 않게 만들어 주었다.
소고라는 악기는 다른 악기들과 다르게 유독 몸을 많이 사용하는 악기이다. 악기 자체의 크기가 작기도 하고, 별도의 가락보가 필요 없을 뿐더러 장구나 북처럼 소리가 웅장하게 큰 것도 아니어서 사실상 ‘악기를 연주한다’ 라기 보다는 ‘악기를 수단으로 활용해 몸짓을 보여준다’ 라는 편이 더 어울린다. 이러한 이유로 소고 치배들은 거울을 많이 보게 된다. 자신의 팔과 다리, 걸음걸이, 소고짓이 얼마나 조화롭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너무나도 어색했다. 소고를 들고 있는 팔, 국악의 걸음걸이를 뜻하는 오금을 걷고 있는 다리, 소고 채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나의 오른손. 이 모든 어색함이 전신 거울 속에 부끄러울만큼 선명하게 비추어진다. 그렇게 몇 개월 동안 한참을 어색하게 거울 속을 바라보며 들었던 생각이 있다.
"내가 이렇게 내 모습을 오랫동안 관찰한 적이 있었던가?"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내가 나를 이렇게 진득하게 바라볼 기회가 있었던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움직이는 모습을 이렇게 빤히 쳐다본 적은. 그리고 알게 됐다. 나는 지금껏 나의 추한 모습을 외면해왔다는 것을. 화장을 하고 세수를 하며 거울을 보면서도 나는 내가 보고 싶었던 나의 모습만 봐 왔다. 내가 보기에 가장 예쁜 표정. 가장 정제된 미소 만을 내 진짜 모습이라고, 그리고 그게 아마 나의 전부일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힘들 때의 나는 어떤 표정을 짓는지, 진지한 나의 눈빛은 얼마만큼의 뜨거운 열기를 가진 것인지에 대한 것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소고가 너무 좋았다. 그리고 나 스스로를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
풍물을 하는 시간들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받아들이고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이었다.
소고를 배우며 외면하지 않는 법도 함께 배웠다.
외면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도 깨달았다.
점점 자연스러워 지는 소고태와 더불어 점점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었다.
이렇게 확신에 차서 자부할 만큼.
드디어 대공연 후기다. 이를 위해 이렇게 길고 긴 서론을 풀었다.
우선 대공연의 준비 과정부터 이야기 하고 싶다. 대공연의 파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4가지 악기가 섞여 진행되는 ‘판 굿’과 악기 종류별로 나뉘어 각각의 무대를 꾸리는 ‘악기춤’이 그것이다. 악기춤은 판 굿과 달리 선배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물론 선배 없이도 혼자서 악기춤을 꾸릴 수 있지만, 1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동아리 수준에서 배운 실력으로 혼자서 악기춤을 진행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내가 배운 악기는 앞서 말 했듯 선배가 없었다. 패장이었던 은비언니가 소고춤을 도와주겠다고는 했지만, 은비언니는 장구치배였고, 패장이었으므로 그 당시 나는 소고춤까지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염치 없이 느껴졌다. 혼자서 소고춤을 이끌어나갈 실력은 더더욱 안되기도 했기 때문에 그냥 판 굿만 참여하겠다고 결심했는데, 한참 동안 잠잠하던 윤아 선배가 어디선가 또 혜성처럼 나타나서는 같이 악기춤을 하는게 어떻느냐고 물었다. 윤아 선배는 북과 소고 두 악기를 다룰 줄 알았다. 소고춤 하자는 이야기를 밥까지 사주면서 하길래 거절하기도 좀 그렇고, 악기 치배가 버젓이 있는데 해당 악기춤을 생략하는 것도 웃긴 모양새라는 뉘앙스로 이야기하길래 오랜시간 고민하지 않고 동의했다. 그렇게 윤아 선배랑 둘이서 소고춤을 추게 되었다. 처음 소고춤을 연습할 땐 동아리를 졸업한 선배의 시간을 뺏는 기분이었다. 내가 휴학생이었어도 학교 나오기 귀찮았을 것 같고, 고작 동아리 하나 하자고 20대 초반의 소중한 시간을 버리고 싶지 않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마음이 동력이 되어 나를 움직였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가르쳐주는데 당연히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이 마음에는 문제가 있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과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전자의 경우는 즐거움이 있었지만, 후자의 경우는 즐거움이 없었다. 소고를 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지만, 공연을 준비한다는 것은 소고를 마냥 즐겁게 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연습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울면서 먹는 겨자도 친구들과 다같이 먹으면 좀 나았던 것도 같다. 연습하느라 방학 동안 매일 학교에 나오면서 하루에 6-7시간을 붙어있으니 서로 정이 들어서 공연이 끝나고 난 후에는 3일만 안 봐도 오래 못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튼 그렇게 연습을 하며 시간을 보내니 어느새 대공연 날이 찾아왔다. 생각보다 긴장이 별로 되지 않았다. 마냥 신이 났다. 리허설을 하면서도 긴장은 전혀 되지 않았다. 리허설이 끝나고 관객들이 슬슬 들어오기 시작했고, 나의 부모님과 친구들이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이 순간까지 떨림은 전혀 오지 않았다. 드디어 길고도 길었던 공연 준비를 끝낼 수 있었기 때문인지, 나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공연 시작 시간이 되자 무대의 조명이 꺼졌다. 이때부터 심장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판 굿의 첫 번째 마당을 마쳤다. 그 다음 순서는 바로 소고춤이었다. 이미 첫 번째 마당에서 진을 빼기도 했고, 처음 받아보는 무대 조명에 얼굴은 막 삶다 꺼낸 감자처럼 뜨거워져 있었다.
그렇게 바들바들대는 팔과 다리를 가까스로 움직이며 멈춰버린 뇌를 대신해 몸이 기억하는 대로 무대를 이어갔다. 소고춤 동작 중에는 윤아 선배와 서로를 먼 발치에서 마주본 채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앞을 보는 동작이 있었는데, 머리에 쓴 고깔과 흐르는 땀 때문에 고개를 숙인 찰나 내 머리가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졌다. 고통스러운 3초동안 마음을 가까스로 다잡고 힘겹게 고개를 들어 관객석을 보았다. 그 순간 관객 대신 내 눈 앞에 보인 사람은 다름 아닌 윤아 선배였다. 미리 고개를 들어 내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안심하라는 듯이, 평소에 같이 연습하면서 자주 보던 미소를 띈 채로. 그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던 뇌에 짜릿하게 전류가 흘렀다. 그리고 내 얼굴에도 미소가 퍼졌다. 배시시. 하고 웃게 되었다.
그 이후론 정신없이 무대를 즐겼던 것 같다. 계획적이고 꼼꼼한 성향을 가진 나는 항상 현재를 즐기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체감을 할 수 없었다. 대충 힘든 일도 즐기면서 하라는 교훈 따위로 치부했다. 하지만 무대를 마치고 흥분으로 가득찬 머릿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떠오른 생각은 "현재를 즐긴다는 게 이런거구나!" 하는 것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무대를 준비하는 과정이 아니라, 무대를 하는 과정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기분과 열정을 경험했고, 그 속에서 현재를 즐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항상 앞에서 이끌어주는 선배들이 있었다. 기댈 수 있는 구석이 있다는 건 이렇게까지 든든한 일임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고마운 마음이 밀려왔다. 사실 윤아 선배가 한나래에 나오는 걸 귀찮아할 것이라고 성급하게 판단한 것은 나의 오만이었다. 내가 뭐라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함부로 재단하고 먼저 선을 긋는가. 무례했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 중에 하나는 틀리고 하나는 맞았다. 미안한 마음은 틀렸고, 고마운 마음은 정답이었다. 윤아 선배의 마음이 어땠든 간에, 그 사람 덕분에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경험과 교훈을 얻었고, 더 풍부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무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우리 모두 서로 즐거웠고 행복했으니. 내가 윤아 선배에게 미안해했던 마음은 어쩌면 파이(∏)의 소수점 셋째자리 같은게 아니었을까. 쓸데없이 길고 불필요하며 보기에 좋지 않은 무언가.
모두 수고했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