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를 사랑했던 열세 살의 소년

인간의 선함과 진실을 그리는 화가

by 여울샘

밀레를 사랑했던 열세 살의 소년. 아니 어쩌면 밀레의 가난한 이들을 향한 시선을 사랑했던 소년. 일제강점기였던 1926년 수근은 컬러로 인쇄된 밀레의 작품을 만났고, 오랜 시간 그처럼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습니다. 나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립니다."



내가 참 사랑하는 화가 박수근의 전시를 찾았다. 박수근이 밀레의 시선을 사랑했던 것처럼, 나는 박수근의 보통의 사람들을 향한 시선을 사랑한다. 박수근은 우리 민족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 일제강점기를 지나고 전쟁까지 만나 폐허가 된 이 땅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삶을 일구어 나가야 했던 이들을 담담히 지켜본다. 남자들이 전쟁에 나가 가정을 책임져야 했던 여인과 노인, 어머니 대신 동생을 업고 돌봐야 하는 누나,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시장에 나가 뭐라도 팔아야 했던 아낙네, 일을 하지 않는 날에는 개울가에 나가 가족들의 빨래까지 해냈던 여인들. 그들은 박수근의 이웃이었고, 매일 보는 풍경이었고, 박수근 본인 또한 가정의 어려움으로 이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야 했었다.



박수근의 작품은 이렇게 따뜻한 시선으로 가장 어려웠던 시기의 이들을 담아낸다. 그의 작품을 보면 이야기로만 들었던 할머니의 삶이 겹쳐지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는 삶 속에서 가족의 생계를 이어 오신 수많은 보통의 삶들이 눈앞에 지나간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그의 작품을 보는 내내 슬픔의 기색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의 그림들 속에서 끊임없는 빛과 희망을 발견했다. 그 빛은 도대체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 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태생적으로 로맨티시스트였던 박수근의 김복순을 향한 고백이다. 이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청년의 고백은 김복순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들은 평생 서로를 누구보다 애틋하게 사랑하는 부부가 된다. 그리고 김복순은 이렇게 그를 회고했다.



'그이는 나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해주셨는지 마치 잃었던 보물이라도 얻은 양 애지중지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고, 자식들이 있었다. 그는 그림만 그리며 살겠다고 고집하지 않았고, 가족들을 위해 보통의 가장들처럼 평안남도 도청의 서기로, 미술교사로, 미군의 px의 초상화가로 끊임없이 일하고 자신의 작품 세계를 완성시켜갔다. 그리고 미군에서 일하던 시절의 인연들을 통해 해외에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 속 느껴지는 희망은 첫 번째로 보통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선함과 진실함 속에 있었고, 그다음은 가족에 대한 사랑 속에 있었다.



그의 작품을 보았을 때 유화 물감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작품 속 사람들이 밟고 서있던 흙의 색을 닮아있었다. 흙을 담아 작품에 칠하고 덧칠한 것처럼 거칠한 표면의 질감은 그의 작품을 더 따뜻하고 눈으로 보고 있으나 손으로 만지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조각처럼 보이는 단순한 선과 사람의 형태는 그가 오랜 시간 연구했던 신라인들의 석불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그림 속 신라의 도공들이 전해준 미를 담고 싶어 했고, 석물들을 탁본하며 연구를 했다. 이 영향으로 화강석의 오돌토돌한 질감까지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전해진 것이다. 그렇게 그의 신념과 노력이 모여 박수근만의 작품이 완성되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늘도 늘 그렇듯 작가의 도록을 하나 구입하여 돌아왔다. 조금 더 일찍 그의 작품이 빛을 보았다면 그가 그리도 사랑했던 가족들을 더 잘 보살필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들지만, 그는 일평생 최선을 다했고, 사랑했고 그의 작품은 작고 후 50여 년 동안 끊임없는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다. 그가 전하고 싶었던 마음이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나에게도 닿았고, 밀레처럼 훌륭한 화가가 되고 싶다던 소년의 기도는 이렇게 하늘에 닿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하늘에서는 그리도 사랑했던 그림 걱정 없이, 원 없이 그릴 수 있기를 바라며.



#봄을 기다리는 나목

#사랑의 화가

#박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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