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록(彩錄)
살다 보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행복한 순간과
죽을 만큼 힘든 시간이 자꾸만 줄다리기를 한다.
순간과 시간들이 옥신각신하는 동안
붕어처럼 주둥이를 겨우 뻐끔뻐끔할 때에는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회색을 달려냈다.
몸이나 정신이 속절없이 아프고 나면
딱 한 번 달릴 만큼의 힘만 남아 있었고
무작정 뛰고 돌아오면 자그맣게 숨통이 트였다.
왜 순간에는 운동에 관심도 없다가
이 시간이 들이닥치고 나야 뛸 생각이 나는지.
앞이 보일락 말락
잊을만하면 줄곧 시간에 지배당했고
물론 지금도 간신히 입만 뻐끔거리고 있다.
조용하고 차가운 회색의 속은
마냥 컴컴하지 않아서 형태가 얼핏 비치는데
또 매우 밝지는 않으니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달까.
끝도 없는 회색에 둘러싸인 채 달리다 보면
발목을 꽉 잡고 있던 과거가 살-짝 느슨해지는데
미래까지는 점프하지 말라고 완전히 놔주지 않더라.
가득 차 있던 것을 한 스푼 덜어내거나
지금보다 한 스푼 더 담아낼 공간만 내어 주고
흰색과 검은색 중 선택하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달리는 것도 나
달라지는 것도 나
돌탑을 쌓아다 기도하고
울다가 웃다가 발버둥을 쳐보아도
상황은 멋들어지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칙칙한 검은색보다는
어디에나 붙이기 좋은 흰색이 낫지.
회색을 달리되 괘념치 말자,
밖에는 알록달록 예쁜 색이 참 많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