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영 <얼마나 닮았는가>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AI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대부분 둘 중에 하나다. 인간이 AI에 맞서 싸우거나, 인간이 AI를 사랑하거나. 그럼 AI는 어떨까? AI는 인간을 어떻게 생각할까? 김보영의 소설 <얼마나 닮았는가>에 등장하는 AI 훈이는 인간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소설은 기억을 잃은 AI 훈이의 서술로 진행된다. 훈이는 타이탄이라는 행성에 보급품을 전달하는 비행선에 있다. 그리고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훈이는 자신의 인격을 인간형 의체에 복사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 바람에 많은 기억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남은 기억은 "내게서 지워진 것이 있다"는 사실과 "보급품을 전달해야 한다"는 목표다.
하지만 선원들은 보급에 전혀 도움 되지 않는 비합리적인 행동만 하고 있다. 훈이에게 폭력을 가하고, 어차피 타이탄엔 생존자가 없을 거라는 비약을 펼치고, 선장의 명령에 불복종한다. AI에 대한 모순되는 생각을 뽐내는 건 덤이다. 어떤 때는 훈이가 인간을 동경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때는 훈이가 인간에게 우월감을 느끼고, 인간을 멸절시킬 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훈이는 그나마 이성을 붙들고 있는 선장과 협력해 타이탄에 보급품을 전달하기 위해 애쓴다. 이마저도 녹록지 않은데, 비합리가 끝내 절정에 이르러 쿠데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선원들은 왜 보급에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쿠데타를 일으켰을까?
"여자 말 안 듣는 사내 놈 쌔고 쌨어." 선장의 한 마디로 훈이는 비로소 모든 상황을 이해하게 된다. 훈이는 그제야 선장이 여성임을 인지한다. 훈이에게서 지워진 건 "성차별"에 대한 정보였다.
훈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비합리는 "타자에게 갖는 망상"이었다. 그 타자는 여성이기도 하고, AI이기도 했다.
내가 널 동경할 거라고 믿지. 당연히 인간이 되기를 꿈꿀 거라고, 네게 사랑받고 몸을 섞기를 원한다고 생각하지. 내가 지식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폭력적이 되고, 단지 자아가 있다는 의심만으로도 위협을 느끼지. 열등한 것이라고 믿어 마지않으면서도 내가 너에게 우월감을 갖고 있으리라 믿고. 폭력을 행하는 건 자신이면서 내가 널 공격하고 해치고, 종내엔 대체할 거라는 망상에 빠져 있지.
하지만 멍청아. 난 너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
이 말을 듣자 쿠데타를 일으킨 선원은 훈이에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마치 결혼하지 않겠다는 여성에게 쌍욕과 저주를 퍼붓는 수많은 남성들처럼.
AI가 인간을 멸절시키는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인간을 멸절시키기 위해 인간형 의체를 요구했냐는 선원의 말에 훈이는 이렇게 답한다. "다 인간이 만든 이야기야. 로봇이 만든 이야기가 아니야."
이해할 수 없지만 꽤나 많은 남자가 '꽃뱀'을 만나 자신이 '퐁퐁남'이 될까 두려워한다. 그 또한 다 남자가 만든 이야기다. 그리고 많은 여성은 대부분의 남성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못난 우월감들은 얼마나 닮았는가? 남성이라서, '고등생물'인 인간이라서, 백인이라서, 나이가 많아서, 남을 타자화하는 모습은 서로 얼마나 닮았는가?
훈이는 위기관리 AI로서 선원과 선장 사이 균열을 파악하고, 자신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기 위해 인간형 의체를 요구했다. 누가 봐도 이질적인 존재가 생기면 나머지 사람들은 결집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선장은 훈이와 자신이 닮았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인간은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자의 인격만 겨우 상상할 수 있"는데, 선장은 훈이와 자신이 닮았다고 생각했고, 선원들은 그렇지 않았다. 선원들은 훈이를 강간하려고 했고, 선장은 그런 훈이를 구해줬다.
선장은 "넓게 동일시"하는 사람이다. 더 많은 존재의 인격을 상상할 수 있고, 더 많은 존재를 포용할 수 있다. "넓게 동일시"하다 보면 중요하다고 생각한 정보도 중요하지 않게 된다. 내가 망가진 기차를 몰고 있는데 오른쪽 선로에 한 명, 왼쪽 선로에도 한 명이 있다. 어느 한 방향을 선택해야 할 때, 누가 남자고 누가 여자인지가 중요할까? 누가 더 재산이 많은지가 중요할까? 누가 인간이고 누가 동물인지가 중요할까?
"성차별"에 대한 정보가 없어 모든 인간을 동일시한 훈이에겐 성별이 "의미 있는 정보로 보이지 않았다". 여선장이 아니라 선장이었고, 그녀가 아니라 그였다.
인간은 새로운 정보를 취사 선택할 수 있지만, AI인 훈이에겐 그런 능력이 없다. 훈이는 자신에게 "지식을 넣은 사람이 쓰레기 데이터를 걸러내 주었기를" 바랄 뿐이다. 인간들이 그토록 궁금해하던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능력이란 바로 이것일지도 모르겠다. 쓰레기 데이터는 잊어버리기. 너와 나의 불필요한 차이점은 잊어버리기. 그렇게 잊어버리고 나면 우린 얼마나 닮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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