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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cey J May 02. 2024

명상으로 만나는 자유

알아차림과 받아들임

누군가 왜 명상하는지 묻는다면 '자유'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나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명상을 시작했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일까?

오늘은 내가 명상을 통해 얻는 것이 무엇인지, 왜 좋은지 영성적 부분을 제외한 개인적 경험을 친구에게 건네듯 나누어 보려 한다.



명상은 심플하게 '알아차림'과 '받아들임'을 생활화하는 트레이닝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명상의 목적이 '선하고 바르게 살기 위함'으로 여겨지는지 명상하는 사람이 어찌 화가 날 수 있냐고 비난하는 경우도 있다. 명상은 현재 화가 발생했음을 알아차리고 분석하여 나의 내면 시스템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하게 해 준다. 즐거움, 기쁨과 마찬가지로 화, 우울함, 분노 같은 감정도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러니 선하고 바른 삶은 명상을 통해 자연스럽게 향하는 방향성이지 일차적 목표로 삼기 애매하다. 그저 나는 나 자신과 조금 더 편안하게 살고 싶어서 명상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끌려다님이 아닌 주체적인 삶으로 방향이 바뀌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스트레스가 외부 상황에 의해 발생되는 것처럼 보여도 꼭 그렇지만은 않다. 똑같은 상황이 사람에 따라 다른 반응을 일으키며 심지어 같은 사람도 당시 마음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의 마음은 계속 변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널을 뛰는 이유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과거로부터 비롯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오늘의 기분을 망치기도 한다. 거기에 매일 벌어지는 예측불가한 외부 상황으로 다양한 감정들에 끌려다니는 피로감을 누구나 경험해 봤을 것이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호흡을 통해 명상에 들어가는 테크닉을 익히기 전에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위에서 '들여다보는 것'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무언가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거리가 조금이라도 확보되어야 한다. 즉,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의 소리와 '들여다보는 나'를 분리하는 것이 우선이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오감의 자극을 통해 좋다, 싫다 분별하는 생각이 올라온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좋다' '맛있다'하며 기분이 좋아지고, 싫은 사람의 전화소리에 '싫다' '피하고 싶다'는 스트레스가 올라온다. 알아차림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이 나 자신에게 발생하는 현상을 한 걸음 떨어져서 관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찰이 하루 종일 이어지면 나라는 존재의 상태(에고)는 계속해서 변하므로 정의 내릴 수 없고, 다만 바라보는 주체인 또 다른 나(진아, 참나, 신성...)는 언제나 한결같이 그대로임을 알게 된다.

바라보는 나에 무게중심을 단단히 두고, 세상을 경험하는 에고적인 나를 관찰하면서 왜 내가 나인지 이해해 가는 과정이 알아차림이다.  마치 허공에 무지개가 생기는 것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무지개를 보려면 투명한 배경이 있어야 하므로 레이어가 계속 투명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우리의 의식을 계속 정화하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꾸준히 관찰하면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레퍼토리를 파악할 수 있다.

나의 레퍼토리는 줄곧 허무함, 공허함이었다. 이렇게 감정이 흘러가는 패턴은 다양한 연유로 생겼을 것이다. 그 연유들은 내가 주체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유년시절을 포함 나에게 '일어난' 사건들과 '주어진' 조건들의 조합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그건 나의 일부분으로 존재함이 분명 하나 절대적인 나다움은 아닌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해석해서 나를 탐구하고 발견하면서 고질적인 감정 패턴과 동일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것이 에크하르트 톨레의 'NOW'라는 책을 20대에 접하고 처음 알게 된 개념으로 인생을 바꿨다고 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되었다.




'받아들임'은 저항 없는 자비로운 시선이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는 남보다 나 자신에게 가혹한 경우가 있다. 나 또한 그랬다. 슬픔을 슬픔으로 느끼기보다 억누르고 부정하는 게 편했다. 아파도 아프지 않아, 슬퍼도 슬프지 않아 하며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 강함으로 무장을 했다. 그렇게 애써 부정한 감정들은 한 겹, 두 겹 우리는 감싸는 무거운 갑옷이 되어간다. 억누르고 끌어당기는 힘은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에 틀림없이 어딘가에서 부작용을 일으킨다. 그래서 알아차림으로 감지된 반응들이 스스로 일어났다가 서서히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릴 수 있는, 허용하는 마음가짐이 꼭 필요하다. 감정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성격, 외모, 외부적 조건 등을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따뜻하게 다독여줄 수 있다면 이미 형성되어 굴러가고 있는 에고에 더 큰 힘을 보태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인생에서 내가 관여할 수 있는 건 나 자신 하나이므로.

또한 받아들임에는 우리의 뜻과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수용이 포함된다. 살면서 내 맘대로 안 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여기서도 '내 맘'이라는 개념 자체가 '에고'의 영역에 있다. 그러므로 '내 맘'이 과연 진짜 내 마음인지 자세하게 관찰해 보면 알아차림의 빛이 켜지게 된다. 이렇게 알아차림과 받아들임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둘 곳 없는 마음의 둘 곳을 찾아서 편하게 해주는 것도 명상, 마음공부의 목적이다.






가부좌 명상은 어렵고 지루하게 보이기도 한다. 요즘 같이 재미난 게 많은 세상에 혼자 골방에 앉아서 뭘 하는 것인지, 자기 자신에게 골몰한다고 무슨 답이 나온다는 것인지 의아하기도 할 것 같다.

아주 길어질 수 있는 이야기지만 간단하게 말해서 쉼과 회복, 그리고 집중을 통한 알아차림의 테크닉 강화로 요약하고 싶다. 일상생활에서 10분 아니 5분이라도 머릿속 재잘대는 목소리를 침묵시킬 수 있을까? 눈을 뜨고 있으면 시각에 들어오는 정보로 인해 생각이 시작된다. 청각, 후각, 촉각을 통해서 쉬지 않고 정보가 들어온다. 어떤 냄새를 맡고 과거로부터의 기억이 되살아나 상념에 빠지기도 하며, 어떤 소리로 인해 깜박한 일이 생각나서 분주해지기도 한다. 그렇게 하루종일 끌려 다니는 게 우리의 일상이기에 모든 자극을 일부러 차단해야 생각마저 멈춘 고요함을 겨우 만날 수 있다. 명상하기 위해 앉아도 생각이 멈추지 않고 찾아오지만 누구나 연습을 통해 점차 빠르고 쉽게 침묵의 시간으로 들어갈 수 있다. 운동과 비슷하다. 자꾸 하면 노하우가 생기는 것처럼 명상도 자꾸 해보면 생각을 멈추는 법을 나름대로 익히게 된다.

그 침묵과 고요의 시간이 좋아서 처음에는 그곳에 계속 머물기만 했다. 꼭 나만의 쉼터가 생긴 것 같았다. 어떤 날에는 깊은 충만함과 기쁨이 가득하여 나오고 싶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그러나 매번 그렇지 않았고 잘 안 되는 날에는 조바심이 나고, 아쉬움이 생기기도 했다. 이렇게 또 하나의 에고적인 생각을 추가한 것이다. 그래서 결과에 대한 강박을 버리고 고요함을 만나 회복하는 시간으로, 또한 집중력을 강화하여 평소 알아차림을 더 잘할 수 있게 도와주는 트레이닝 시간으로 여기게 되었다.



요가 전통에서 명상을 배웠을 때는 옴 챈팅을 많이 하면서 여러 가지 호흡법을 했다. 현재 하는 불교 명상은 자애명상, 부정관 그리고 간단한 호흡 집중명상이 주를 이룬다. 마음 챙김의 시선으로 보면 성당의 묵주기도도 만트라 명상과 다르지 않다. 각자에게 울림을 주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시작하면 좋겠다. 이미 세상에 나와있는 수많은 길을 통해 이르는 곳은 하나임을 갈수록 느끼게 된다.

행복의 정의가 무엇이냐는 나의 물음에 스님은 'Non-attachment'라는 짧고 명확한 답을 주셨다. 정말 그렇다, 마음공부를 하면 할수록 나라고 할 것이 따로 없음이 분명해지고, 따라서 어느 것도 집착하고 갈애할 필요가 없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받아들임이 삶으로 체화되려면 이해와 더불어 수련이 필요하다.  



어제 초등학생 아이가 귀여운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이 강아지는요, 자기가 얼마나 귀엽게 생겼는지도 몰라요. 개는 거울 속 자신을 알아볼 수 없대요.

그러면 대체 왜 사람들이 자기를 이토록 귀여워하나 이상할 거 같아요."


"강아지는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을 거야.

너에게 예쁨 받는 지금이 그저 행복해서 꼬리를 치는 거야."


강아지도 나름대로 고충이 있겠지만 사람보다는 마음이 자유로울 것 같다.

나무와 새, 자연 속의 모든 존재들이 그렇듯.

그들의 레이어는 투명하기 그지없어 무지개를 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그들을 보며 그렇게 일깨움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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