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빈이와 루
"수빈아 일어나봐. 산타 할아버지가 수빈이에게 선물을 주셨네!"
수빈이는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는 이유식을 배부르게 먹은 루가 가만히 서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앵무새네!"
수빈이는 깜짝 놀라며 환호했다.
"산타 할아버지가 수빈이가 원하는 선물 주신거야?"
"응."
"앵무새 원했었어?"
"응!"
웃음이 나왔다. 고양이에 대한 생각은 이미 잊혀진 듯했다.
수빈이는 거실바닥에 납작 엎드려 루를 빤히 쳐다보며 너무 귀여워! 너무 예뻐!를 연발했다.
2014년의 크리스마스, 그날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좋았다. 작고 귀여운 아기새 한마리가 세상의 전부였던 하루였다.
글의 흐름과는 어긋나지만 두 가지 내용을 먼저 기록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루는 산타할아버지의 마지막 선물이 되었다. 이는 수빈이가 다음 해에 중학생이 되어서가 아니었다. 루를 만난 초등학교 6학년의 크리스마스날, 수빈이는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이라는 건 거짓이었다는 걸 눈치챘다고 한다. 바로, 거실 바닥에 있던 검은 비닐봉지 때문이었다.
비닐봉지 안에는 전날 버드스토리에서 구입한 루의 모이들이 들어있었다. 수빈이는 '산타할아버지라면 저런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주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루는 엄마가 데려온 아이였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받은 모든 산타할아버지의 선물 또한 엄마의 선물이었으며, 엄마는 산타할아버지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믿게 하기 위해 해마다 산타할아버지의 선물과 엄마의 선물로 선물 두 가지를 준비했었으며, 이 세상에는 산타할아버지가 없다는 친구들의 말이 옳았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검은 비닐봉지의 위력이란 실로 대단했다.
'루'라는 이름은 수빈이가 지었다. 과일, 채소, 색깔 등에서 나온 수많은 이름을 말하다가 그냥 내뱉어본 '루'가 너무 마음에 들어 바로 선택했다. 그때 난 '루'라는 이름에 아이들의 성을 조합할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우리 아이들의 성은 '조'씨다. 루를 부를때 성을 붙여 불러본 적이 없어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몇 년이 흘러 - 아마도 5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 순간 깨달았다. 물론, 깨달음 후에는 일부러라도 성을 붙이지 않았다. 루는 그저 '루'였다. 그래야만 했다.
글의 흐름을 따라가자면, 루와 수빈이는 첫 만남부터 서로 끈끈한 우정을 나눠야 했지만 실제는 그러질 못했다. 둘의 관계는 한동안 수빈이의 짝사랑이었다.
루는 수빈이를 조금 경계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오로지 나와 성빈이만 따랐다. 나와 성빈이가 만지면 가만히 있었지만 수빈이가 만지거나 손으로 감싸면 바로 물었다. 수빈이는 이에 대해 굉장히 서운해하면서 이 모든 게 루를 집으로 데려와 첫 이유식을 먹일때 본인이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일거라고 말했다. 나도 아마 그런 것 같다며 동의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다르다. 나를 따른 건 내가 루의 엄마였기 때문이고 - 아마 루는 본능적으로 알았으리라. - 성빈이를 따른 건 성빈이에게는 동물들이 좋아하는 그 무언가가 있기 떄문일 거였다. 루 뿐만 아니라 나중에 가족이 된 뽀리도,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찌찌와 파래도 이상하게 성빈이에게는 처음부터 경계심이 없었다. 길고양이까지 성빈이를 잘 따른다.
어쨌든 다행히도 루의 경계심보다 수빈이의 사랑의 힘이 더 컸고 이후 둘은 세상의 다정과 사랑을 다 끌어모은 듯한 끈끈한 관계가 되었다.
루는 차멀미가 심했다. 앵무새가 차멀미를 한다는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루는 차를 타고서 5분이 지나면 계속 토하면서 힘들어 했다. 멀미 때문에 루를 데리고 이동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루가 워낙 보채서 어쩔 수 없이', 그리고 '혹 지금은 차멀미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몇 번 차에 태운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어디 멀리 간 건 아니었고 고작해야 학원 수업이 끝난 수빈이를 데리러 갔던 10분 정도의 거리였다.
"루야 저기가 언니 학원이야. 언니한테 가자. 언니!"
"삑!"
"언니!"
"삑!"
비록, '언니'라는 말은 못했지만 똑똑한 루는 '언니'가 어떤 의미인지도, 누구를 말하는건지도 다 알았다. 언니를 데리러 간다는 말에 루는 기분이 좋아서 나의 '언니!' 소리에 신나게 맞장구를 쳤다.
수빈이가 집에 돌아오면 루는 늘 수빈이와 함께 했다. 정확히 말하면, 늘 수빈이 손바닥 위에 엎드려서 가만히 있거나 잠을 잤다. 루가 함께 했던 시간동안의 사진을 보면 수빈이의 손바닥 위에 엎드려서 잠을 자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수빈이는 공부할때도 자신의 왼손을 기꺼이 루의 침대로 내어주었다. 내가 말려도 소용없었다. 그건 둘의 행복이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동안 수빈이가 사춘기랄 것도 없이 잔잔하게 지낼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루의 존재때문이었으리라. 언젠가 학원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수빈이가 이런 말을 했다.
"엄마, 나는 학교 갔다가 학원 갔다가 너무 힘들거든? 근데 '집에 가면 우리 루 있다'하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져."
2021년 루는 떠났지만, 지금도 수빈이의 핸드폰 배경화면은 루의 사진이고, 수빈이의 카톡 프로필도 루의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