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어 씁니다 _ 나의 몸
병원은 깨끗했다. 1층부터 마지막층까지 뻥 뚫려있는 천장은 투명한 재질로 되어있어 파란 하늘과 햇살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고 상아색 벽면은 천장에서 비춰주는 햇살을 받아 병원을 따뜻하게 감싸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10년 만에 건강검진하러 온 답답함과 긴장이 잠시나마 풀리는 것 같았다.
“새 병원이라서 좋긴 좋네.”
나는 마치 구경이라도 하듯 천천히 움직이며 병원의 구석구석에 감탄했다. 그러나 이 감탄이 깨져버린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가장 먼저 가야 할 곳은 시력검사실이었다. 나는 검사실 앞쪽에 놓인 의자들을 쭉 둘러보았다. ‘높이가... 낮은 게 없네.’ 나는 비슷비슷한 높이의 의자 중 그나마 가장 낮게 보이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의자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았는데도 내 발바닥은 온전히 땅에 닿지 못하고 종아리는 o자형으로 된 채 발끝은 세워져 서로를 바라보며 버티고 있는 어정쩡한 자세가 되었다. 의자 등받이와 내 등 사이는 8차선 도로가 나 있는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만약 내가 용기를 내어 등받이에 내 등을 밀어붙이기라도 하면 겨우 땅에 붙어있는 내 발끝은 땅에서 떨어지고 나는 뒤로 발라당 넘어지는 듯한 우스꽝스러운 꼴이 될 게 분명했다. 물론, 엉덩이를 의자 깊숙이 넣어 등받이에 등을 붙일 수는 있었다. 대신 내 두 발은 허공에 떠서 대롱대롱 흔들려야만 할 것이었다.
“예전엔 안 이랬는데. 우리나라가 어쩌다가 이렇게 된거야?”
정말 그랬다. 예전엔 병원이든 어디든 놓여 있는 의자들이 다 낮았다. 내가 엉덩이를 의자 끝에 밀어넣고 허리를 곧게 세워 등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도 두 발바닥을 안정적으로 땅에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하나둘씩 높아지더니 이제 새로 만들어지는 모든 것들이 거인국에 맞춰지는 듯했다. 종아리에 점점 힘이 들어가고 등과 어깨가 뻐근해졌지만 이 의자에서 끝까지 편안한 척 앉아있는 게 마치 내 자존심인 양 버티고 있었다. 딩동-. 드디어 내 이름이 모니터 가장 윗줄로 올라갔다. 다행이다. 이제 하릴없이 자존심을 내걸지 않아도 되었다.
시력검사실은 좁고 어두웠다. 안경을 쓴 채로 대충 시력검사를 하고 안압검사를 위해 등받이 없는 작고 동그란 의자에 앉았다. “여기에 턱을 대고 여기에 이마를 대세요. 좋아요. 눈 크게 뜨고 깜빡이지 마세요.” 나는 검사원이 시키는대로 했다. 그러나 검사원은 버튼을 누르지 않고 계속 초점을 맞추었다. 눈이 점점 뜨거워지더니 아파오기 시작했다. 도저히 못 참겠어서 이마를 떼고 눈을 감았다.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에고, 다시 할게요. 눈을 크게 뜨셔야 해요.” 나는 다시 턱과 이마를 붙이고 눈을 크게 떴다. “좀 더 크게 떠보세요.” 나는 눈에 힘을 팍 주며 최대한 크게 떴다. “좀 더 크게 뜨셔야되는데...” 결국, 옆에 있던 나이든 검사원이 내 두툼하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올리고서야 검사를 마칠 수 있었다. ‘아침부터 소소하게 굴욕이네.’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검사실을 나왔다.
키 155 몸무게 42. 초등학생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내 몸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작다. 손도 작고 발도 작고 키도 작고 심지어 눈도 작다. 그렇지만 나의 이 작음 때문에 특별히 불편하거나 자존감이 낮아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세상이 점점 거인화가 되어가면서 나를 불편하게 하고 구석으로 내몰았다. 분명 내 신발 크기는 225였는데 어느 순간 225를 신으면 헐거웠다. 내 발은 그대로인데 신발 크기가 변한 것이다. 이제 내 발 크기는 더 이상 225가 아닌 220이 되어버렸다. 기성화를 사려고 해도 맞는 신발이 있을 리 없다. 지하철에서는 힐을 신지 않으면 두 발을 지하철 바닥에 붙이고 앉아있을 수가 없고 세상을 둘러봐도 두꺼비처럼 튀어나온 못생긴 외꺼풀 눈을 가진 사람은 나밖에 없는 듯 보였다. 엘리베이터에서 거인같이 큰 사람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올 때 그나마 붙들고 있던 내 자존감은 흩어져 사라지게 되는데 마치 거인들이 내뿜는 공기가 나를 무겁게 짓눌러 내 몸이 얇은 판자처럼 납작해진 채로 바닥에 붙어있는 기분이 들게 된다.
“검사 끝났습니다. 내려오셔서 속옷 입고 나오세요.”
상상 속 엘리베이터 거인들이 의사의 목소리에 펑 하고 사라졌다.
“별다른 문제는 없어요. 염증도 없고 암으로 보이는 것도 없고요. 다만 요즘 생리가 어떠신가요? 자궁이 이제 더 이상 일을 하지 않는 자궁이에요.”
일을 하지 않는 자궁? 완경인가?
“완경이에요. 그러다 갑자기 한두 번 나올 수는 있는데 그 후로는 완전 끝날 거에요.”
“정말요? 드디어 끝났네요!”
“이제 갱년기가 시작될거고 그러면 몸이 아플 수가”
“괜찮아요!” 나는 기쁜 나머지 의사의 말을 잘라 소리쳤다. 무슨 말일지 뻔히 예상되었다. 몸이 아플 수가 있으니 잘 살피고 조심하고 힘들면 병원에 와서 호르몬 처방을 받으라는 소리겠지.
“괜찮아요. 저는 이미 안 아픈 곳이 없거든요. 허리디스크랑 목디스크 있고요, 뭐 불면증은 기본이고요, 양쪽 어깨 모두 오십견 한 번씩 진하게 앓았었고 최근에 정형외과 갔더니 무릎 연골도 안 좋대요. 어쩐지 내리막길 걸을 때마다 무릎에 통증이 느껴지더라고요. 게다가 10년 전에 건강검진했을 때 골소공증 진단받았으니 지금 벌써 골다공증 왔을거에요. 전 이제 더 이상 올 게 없어요. 그냥 꾸준히 관리만 하면 돼요. 흐흐흐흐.”
완경이라니 이리 개운할 수가. 이제 비가 내리면 냄새 걱정없이 비 내리는 풍경과 빗소리를 감상하고 해가 쨍쨍 내리쬐는 여름날에도 기꺼이 땀 흘리며 당당하게 걸을 수 있다. 갑자기 몸속에서 미끄덩거리는 액체가 흘러나오는 느낌도 없을거고 생리 예정날짜가 다가올 때마다 오늘 나오려나 내일 나오려나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게 됐다. 아픈 배를 움켜쥐고 진땀 흘리지 않아도 되고 갑자기 나온 생리혈이 속옷에 묻어 당황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문을 열고 나서는데 더 이상 의자의 높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병원 가운을 입고 편하게 앉아있는 거대한 사람들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세상이 이미 거인국이 되었다고 해도 상관없다. 거인들아 너희들은 세상의 중심에서 맘껏 꿈을 펼치며 생리하렴. 나는 세상의 구석에서 나 홀로 쭈그려 앉아 맹물을 홀짝이더라도 생리같은거 안 하고 살 거야.
저쪽에서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른다.
“네, 저 여기 있어요!”
나는 가벼운 걸음으로 깨끗하고 환한 복도를 걸어 거인들 사이를 지나 다음 검사실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