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알고 싶어서, 배우고 싶어서
"내가 길에서 꽃 사진을 찍을 줄이야."
"요즘엔 아무 가사 없는 연주곡이 좋아."
"가자미 무침 진작 먹어볼 걸 그랬네."
취향은 변한다. 휴대폰 사진첩 가득 채워진 들꽃 사진을 볼 때면, 클래식 음악방송 라디오 주파수를 확인할 때면, 친정아빠가 좋아하는 가자미 무침에 자꾸 손이 갈 때면 변한 취향을 실감한다. 언제부터 취향이 바뀐 걸까. 찬찬히 기억을 돌이켰다. 아이를 키우며 길에 핀 꽃에 관심이 생겼다. 보살핌 없이 스스로 피어나는 들꽃의 생명력에 감탄하며 사진을 찍었다. 연주곡에 취미를 붙인 건 운전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미숙한 운전으로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초조했다. 마음을 안정시키려 켠 라디오에서 마침 클래식 연주 음악이 흘러나왔고, 부드러운 선율에 평온을 되찾았다. 가자미 무침을 좋아하게 된 것도 계기가 있다. 유난히 기력이 떨어지고 입맛도 없던 날이었다. 친정 밥상에 오른 가자미 무침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평소에 관심 없던 반찬이었건만, 덕분에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이렇듯 변화에는 사소하지만 분명한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하지만 최근에 깨달았다. 때로는 특별한 계기 없이 마음을 내주는 존재도 있다는 것을. 시(詩)가 그렇다.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던 시가 어느 순간부터 좋다. 은유법, 점층법 같은 수사법이나, '민족 저항 상징'에 형광펜 밑줄을 치던 학창 시절에는 시험에 나올만한 특징을 그저 외우기만 했다. 음미하기보다 억지로 머릿속에 집어넣었던 날들이었다. 그렇게 문학 중에 제일 관심 없던, 어려운 암호처럼 여겨진 시가 어느 순간 마음속에 들어왔다.
시를 배우고 싶었다. 시인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깊게 알고 싶었다. 흔한 단어 안에 숨겨놓은 비밀을 찾고 싶었다. 한 번 읽어서는 이해되지 않는 안타까움을 나눌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다. 겨우내 품고 있던 결심을 이제 실행하기로 했다. 아이가 학교 간 사이 들을 수 있는 수업을 찾아보았다.
유레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진행 중인 시 수업을 발견했다. 시 수업은 구청과 연계된 곳에서 열렸다. 타 기관에 비해 강의료가 저렴하고 집에서도 가까웠지만,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수업을 담당하는 교수님 때문이었다. 30년 전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교수님의 시 수업을 여기서 듣게 될 줄이야. 서둘러 두 달 후 열릴 강의 수강 신청을 마쳤다.
첫 수업이 있던 날, 아이를 학교에 내려주고 부지런히 강의실로 향했다. 10시 수업인데 사고가 났는지 차가 너무 막혔다. '이런, 첫날부터 늦고 싶지 않은데.' 안되겠다 싶어 가까운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고 버스를 탔다. 버스 전용도로로 달리면 지각은 면할 듯했다. 버스에서 내려 허겁지겁 뛰었다. 엘리베이터는 공사 중이라 3층 강의실까지 계단을 두 개씩 헐떡거리며 올라갔다. 다리에 걸리는 트렌치코트가 거추장스러웠다. 강의실 앞에 도착한 후 시계를 보니 9시 59분. 호흡을 가다듬고 강의실 문을 열었다.
강의실 안에 들어서자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