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는 같은 마음을 찾는 것
"안녕하십니까."
백발의 교수님을 향해 인사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교수님은 수강생을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아 강의실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익숙한 듯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며 가벼운 안부를 물었다. 수강생들은 공손하면서도 수줍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든을 넘긴 교수님 앞에서는 환갑 지난 수강생도 어린 학생처럼 보였다.
수업이 시작됐다. 연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 TV에서 들었던 음성 그대로다.
"내가 여러 번 얘기했을 거야. 정의를 내리는 건 시가 아니라고. 나와 같은 마음을 느끼는 존재를 찾아보는 게 먼저지. 집에 있는 강아지는 강아지일 뿐이야. 그런데 어느 순간 내 신세와 같다고 감정이입되는 순간이 있단 말이야. 그제야 강아지가 의미 있는 하나의 형상으로 보이는 거야. 그걸 쓰는 게 시라고."
문득 고양이 보비가 떠올랐다. 대학 시절, 영국에서 1년간 지내는 동안 머물던 집에서 보비를 처음 만났다. 집주인은 유기묘였던 보비를 입양해서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늦은 아침, 부엌 식탁에서 시리얼에 우유를 먹고 있으면, 보비는 어느새 나타나 내 무릎 위로 풀쩍 올라왔다. 허벅다리 위에서 따끔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작고 날카로운 발톱이 낯설었다. 녀석을 쓰다듬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동물을 키워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방까지 이어진 3층 계단에 앉아있는데, 보비가 다가왔다. 자연스레 내 옆에 자리를 잡더니 “야아옹” 하며 울었다. “보비, 너도 엄마가 보고 싶니?” 유난히 엄마가 보고 싶던 날, 처음으로 고양이에게 말을 걸었다. 마치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비는 평소처럼 소리를 냈을 뿐인데 그날따라 왜 이렇게 처연하게 들리던지. 유기묘였던 보비의 처지가 왜 이렇게 애달프게 느껴지던지. 그때 내가 시를 배웠더라면, ‘말하는 고양이’라는 시 한 편이 탄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앞으로는 이런 마음을 떠나보내지 않고, 세밀한 언어로 표현해 보리라 생각했다.
그때 수업 자료가 수강생들에게 전달됐다. 박재삼 시인의 시, '울음이 타는 강'이 실려있었다.
“삶에서 슬픔을 가져온 시인이 있어. 박재삼 시인이야. 내가 아주 잘 아는 시인이지.”
교수님은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시인과 나눈 사담을 전하며 그를 추억했다. 시를 읊는 교수님의 음성에 맞춰 눈으로 찬찬히 시를 읽어 내려갔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 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울음이 타는 가을 강, 박재삼 시인-
'나와 같은 마음을 느끼는 존재를 찾는 일이 먼저'라는 교수님의 말처럼, 박재삼 시인은 가을 강에 비친 자신의 마음을 본 것일까.
교수님의 설명을 들으며 시를 살피니, 미처 보지 못한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느꼈을 외로움이, 모두 배불리 먹는 제삿날에 느꼈을 서글픔이. 사랑을 시작했던 순간들은 어느새 지나가고, 이제 모든 사랑이 끝난 소멸의 자리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쓸쓸한 마음이.
‘글쓰기, 이 좋은 공부’의 저자, 이오덕 선생은 말했다. ‘글감은 단순한 객관 사물로서 글의 재료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물과 경험 가운데 특별히 글 쓰는 이의 마음에 들어온 그 무엇이다. 쓰는 이의 마음에 특별히 들어왔다는 것은 쓰는 이의 삶 속에서 그 무엇이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말한다.’라고.
해질녘 가을 강이 한 편의 시가 된 것처럼, 의미 있는 형상으로 특별히 마음에 들어온 존재를 살펴봐야겠다. 연결고리를 찾는 순간, 강아지는 그저 강아지가 아니고, 고양이는 더이상 고양이가 아닐 테니.
"자, 그럼 이제 각자 써온 시를 발표해 봅시다."
수강생들이 한 주간 습작한 시를 발표할 시간이 왔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