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에서 쓰지 말아야 하는 말
언젠가 배우들이 출연한 TV 토크쇼를 보았다. 여러 이야기 가운데 무명 시절에 받았다는 신체 연기 수업 이야기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배우들은 자신을 백조 같은 ‘동물’이라고, 혹은 공 같은 ‘사물’이라고 생각하며 연기했던 경험을 개성 있는 몸짓과 표정으로 재밌게 풀어냈다. 함께 출연한 패널들처럼 나 역시 웃음을 터뜨리며 감탄했다. 배우들의 뛰어난 입담과 더불어 대상을 향한 탁월한 관찰력과 상상력이 돋보였다. 배우는 타인의 삶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그려내야 하기에 이런 훈련이 필요하겠구나 싶었다.
한때 SNS에서 유행했던 이 질문도 비슷한 맥락인 듯하다. ‘만약 아침에 일어났는데 내가 바퀴벌레로 변해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라는 다소 황당한 질문 말이다. 이 질문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 도입부와 연결된다. 소설은 주인공이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거대한 벌레로 변한 자신을 발견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신선한 충격을 주는 도입부처럼, 이 질문 역시 낯선 상상 속으로 상대를 이끈다. SNS에 올라온 후기들도 각양각색이다. '평생 주머니에 넣고 다닐게', '그래도 사랑해 줘야지', '숲에 방생하는 게 낫지 않아?', '인류를 위해 사라져야지', '도대체 그런 걸 왜 묻는 거야!' 등 반응이 재밌기도, 짠하기도, 사랑스럽기도, 현실적이기도 하다. 상식에 얽매이다 보면 공상이 낯설게 느껴진다. 그럴 때 이런 엉뚱한 발상은 잠자고 있던 상상력을 자극한다.
세밀한 관찰과 독특한 상상력으로 쓰인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처럼, 시(詩)를 쓸 때도 대상을 낯설게 바라보고 나만의 상상으로 그려내는 과정이 필수이다. 두 번째 시 수업에서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시에서 쓰지 말아야 하는 말이 있어. 통념이 뭐지? 통념은 세상에서 속담처럼, 격언처럼 다 아는 얘기란 말이야.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이런 말들, 이런 통념을 마치 대단한 발견처럼 쓰면 안 되는 거야.
산문에 붙어있는 통념을 시에 가지고 오지 말아. '하늘'을 쓸 때 그저 하늘이라고 하면 되는 거야. 괜히 '파란 하늘' 혹은 '파란 하늘 흰 구름'처럼 단어를 붙일 이유가 없어. '보도블록 사이에 피어난 민들레'라거나, '일편단심 민들레' 같은 관용구를 피하라는 얘기지.
대상을 낯설게 바라봐. 그리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해."
교수님은 이어 조영수 시인의 '민들레'라는 시를 소개했다.
민들레
소문나지 않게
바람이 만지작거리던
맨살의 풀밭에다
그녀가
내게 벗어 준 밤
부끄러워 속 붉히던 달빛을
누가 한 줌
집어다 놓았나.
이 짧은 시 안에 들어있는 민들레는 그동안 보았던 민들레가 아니었다. 시인이 창조한 달빛 머금은 민들레가 수줍게 피어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노란 민들레를 '부끄러워하는 달빛의 색'으로 표현한 시구를 읽으며 감탄했다. '낯설게 바라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라는 교수님의 말씀이 이 시 한 편으로 설명되는 듯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며 몇몇 단어를 떠올려보았다. 이상했다. 토끼라는 단어를 생각했더니 '깡충깡충'이, 단풍잎을 생각했더니 '다섯 손가락'이 떠올랐다. ‘아임 파인’ 다음엔 ‘앤 유?’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도 모르게 자리 잡은 수많은 통념을 피해 시를 쓰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자동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를 넘어 새로운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했다.
시(詩)에 관심을 가진 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매일 길을 걸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는 점이다. 그날도 다름없었다. 아이와 함께 걷다가 문득 보이는 것이 있었다. 우리 뒤를 따르던 아이와 나의 그림자. 그림자를 어떻게 시로 표현하면 좋을까.
첫 자작 시를 향한 고민이 시작됐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