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엄마는 왜 내 엄마이고, 나는 왜 엄마 딸로 태어난 걸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그렇게 말해선 안 되는 거였지만, 기어코 마음속에 내내 움을 트고 있던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것을 발화하는 순간, 나는 그것이 나의 오래된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언젠가 엄마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엄마, 나는 사는 동안 내내 엄마에게 진심어린 이해와 공감을 바라왔어. 그거 하나만을 계속 바라왔어. 이 말을 들은 엄마는 잠시간 침묵하더니 입을 뗐다. “예란아, 너는 왜 내가 너에게 줄 수 없는 걸 자꾸 바라니.”
그 간격.
딱 그 정도의 간격.
절대 메울 수 없고 허물 수 없는 간격이 우리 사이엔 늘 이끼처럼 껴 있었다. 그리고 그 간격, 그 벽을 느낄 때마다, 대화에서 수시로 우리 사이를 가로지르는 그 벽을 느낄 때마다 그것은 나에게 상처가 되고 또 다시 새로운 벽이 되어 나는 점점 엄마에게 마음을 닫아간다. 그녀와 나는 그저 이토록 가볍고 실속 없는 이야기들만 주고받을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관계라는 것이 또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좌절하게 하고 우울하게 하고.
그리고 마침내 포기하게 하고.
나는 더 이상 그녀와 그 어떤 진지한 얘기도,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감추어진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게, 할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깨닫게 된 것은, 그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그러므로 그 어떤 결심이나 다짐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거다. 나는 태생적으로 누군가의 공감과 이해가 필요한 사람이고, 엄마는 다른 모든 것은 줄 수 있을지언정 공감과 위로, 이해, 그것만은 자신에게 애초에 없었으므로,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누군가에게, 그게 설령 자식에게라도 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에게 바라면 바랄수록, 요구하면 요구할수록 이 벽은 더 견고하고 거대해질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갈망할 때 비참해지게 된다. 팔자에 없는 성공을 바라거나, 팔자에 없는 사랑을 바랄 때 더 없이 좌절하고 비참하고 심지어는 비굴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건 처음부터 바라지 않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먹을 수 없는 감은 처음부터 찔러보지 않는 것이 좋은 것처럼. 그저 아 내 인생에는 그러한 것이 예정되어 있지 않음으로 나는 그것을 어떻게 해도 가질 수가 없군요, 없는 거군요,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어느 부분에서는 그저 적당히 포기하고 적당히 모른 채하며 적당히 덮어두며 사는 것이 더 지혜로울지도 모른다고.
참, 그렇게 생각해보니 우리 엄마도 참 답답했겠구나 싶다. 자신이 돈을 주고 살수도, 노력한다고 얻을 수도 없는 것을 자식이 자꾸 달라고 요구하니. 얼마나 답답하고 짜증이 났겠는가.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바라며 살지 않겠다고. 요구하지 않을 거라고. 그저 벽이 있으면 있는 대로 놔두고, 그것의 존재를 받아들이기로. 우리가 나눌 수 있는 대화가 그저 이런 영양가 없는 이야기일지라도. 어쩌겠는가 하며 그저 나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다른 대상을 찾을 수밖에 없겠다. 그게 비록 내가 가장 바라왔던 대상이, 나를 세상에서 가장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상대가 나의 부모가 아닐지라도, 그를 대신할 차선책을 찾을 수밖에 없겠다.
완벽하진 않을지라도, 그렇게 적당히 체념하고 적당히 만족하며 살아가도 꽤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며,
적당히 적당히 사는 것이 정답은 아닐지라도 해답이 될 수 있겠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