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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결핍은 나를 어떤 어른으로 키웠나

마음속에 선명히 떠오른 한 가지, 나의 어렸을 적 가장 큰 결핍

by 김예란


최근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게스트로 나온 모 배우와 그의 어린 아들의 사랑스런 일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화면에는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커다랗고 번듯한 집과, 그보다 더 감탄스러운 부자의 단란한 모습이 담겨있었습니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다정스런 눈빛과 온몸으로 해사한 웃음을 터트리던 아이의 모습이란, 참.

스크린을 뚫고 나오는 행복의 기운에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기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가만 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런 아이는 커서 어떤 어른이 될까?’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풍족한 환경과 자상한 부모님 아래에서 사랑을 담뿍 받고 자란 아이는 후에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분명 구김살 없는 청년이 될 것 같았어요. 표정이나 성격에 그늘지고 뒤틀린 모습이 서려있지 않은 그런 사람이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내면 깊이 존재하는, 그래서 곤경에 처해도 금세 씩씩해질 수 있는 사람. 제가 이제껏 봤던 이들은 대체로 그랬거든요. 안정적인 환경에서 큰 결핍 없이 자란 사람들의 형상은.




저희 집은 가난했어요. 그리고 으레 가난한 집이 그렇듯, 그리 화목치 못했습니다. 자아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짙어질 무렵인 중고등학생 시절은 거의 파탄 수준이었죠. 경제적인 면에서든, 가족 간의 신뢰관계에서든.


저는 그로부터 오는 결핍이 미웠습니다.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종종 저를 갉아먹는 이 결핍이 없었더라면 나도 세상을, 사람을, 나 자신을 조금 더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싶어서요.


그런데 그저 밉기만 했던 이 결핍에 대해 최근 들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김신지 작가의 에세이<평일도 인생이니까>에서 결핍에 관한 전혀 새로운 관점을 접하고부터였는데요,

몇 글자 적어보겠습니다.



결핍은 어쩌면 우리의 정체성이 된다.
비어 있는 부분을 채우려 애쓰는 사이,
그런 것을 중요히 여기는 사람이 되는지도.


(중략)

어른이 된다는 건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는, 어린 우리가 그토록 바랐던 것을 스스로에게 주려고 어른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과자를 사먹지 못했던 아이는 나에게 과자를 사주는 어른으로 자라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못했던 아이는 원하는 장난감을 나에게 다시 사 줄 수 있는 어른으로 자라고, 좁은 시골마을에서 살았던 아이는 낯선 나라를 여행하는 어른으로 자란다.




글을 읽고 곰곰 생각해보았습니다. 나의 결핍은 나를 어떤 어른으로 키웠나. 그러자 마음속에 선명히 떠오르는 한 가지가 있었어요. 저의 어릴 적 가장 큰 결핍, ‘누군가 내 말을 들어주고, 이해해주고, 공감해주었으면 좋겠다.’

저는 줄곧 부모님께 그런 걸 바라왔습니다. 제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왜 그런 언행을 보이는지, 지금 어떤 상태인지 관심해주길 바랐어요. 내 얘기를 들어주고, ‘정말 힘들었겠구나.’ ‘이런 게 너의 상처였구나.’ 알아주기를. 매번 질책하고 비난하고 비정상이라고, 너는 비정상이라고 소리치는 게 아니라요. 뭐, 20살이 되어 집을 떠날 때까지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런 결핍은, 저를 타인의 서사에 귀 기울이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스스로 무언가를 ‘잘’한다고 인정해주는 일이 굉장히 드문데요, 이거 하나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잘 듣는’ 사람입니다.


상대방이 말할 때 딴 생각하지 않고 눈을 맞추면서 이야기에 집중합니다. 표정과 음정의 변화, 언어의 모양새, 미세한 떨림 같은 것들을 눈에 담으면서. 그럼 노력하지 않아도 어느새 그 사람의 심정과 감정이 마음으로 느껴집니다. 그 사람의 애환에 마음 깊이 공감하게 되어요.


물론 선천적으로 그런 면모가 어느 정도 타고난 것도 있겠습니다만, 분명한 건 결핍이 저를 더욱 ‘그런 사람’이 되도록 만들었다는 겁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건, 타고난 성향으로 인해 제가 그런 행동을 단순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감· 위로· 경청과 같은 요소들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서 ‘인식하게’ 되었다는 건데요, 그 말은 즉 제 인생에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 어떨 때 저라는 사람이 정서적으로 가장 안정되는지 스스로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 어쩌면 그로인해 ‘에세이’라는 장르에 강렬히 끌렸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학생이었을 적, 제 적성과 소질은 생각을 글로 표현해 서론, 본론, 결론의 구성을 짜내고 문장과 문단 사이를 논리로 매끄럽게 연결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쪽으로 진로를 잡은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고요.

하지만 소설, 논설, 평론, 칼럼, 설명문 등 다양한 글의 장르 중에 저는 유독 에세이에 마음이 갔습니다. 아마 저의 결핍이 ‘사람들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글이 누군가의 내면에 가닿기를’ 바라는 쪽으로 저를 이끌었다고 생각해요.


처음으로 잡지에 제가 쓴 에세이를 싣던 날, 원고료나 커리어 따위는 필요 없으니 단 한사람에게라도 이 글이 위로가 되었으면, 용기로 닿았으면. 하고 바랐던 순간을, 그 간절함을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아,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결핍은 저에게 ‘이상형’을 만들어주었어요! 저는 미래의 배우자에게 바라는 3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 번째 ‘공감능력’ 두 번째 ‘젠더감성’ 세 번째 ‘눈치’입니다. 각각 따로 나열해 놓았지만, 사실 저 세 가지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공감능력이 떨어지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 고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기 힘들고, 상황의 맥락이나 상대방의 감정변화를 기민하게 포착하는 것도 사실상 어렵기 때문입니다. 제가 인생에서 그런 것들을 중히 여기기 때문에, 저와 평생을 같이 할 반려도 이의 미덕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리해보자면, 결국 저의 가장 큰 결핍이 ‘나’라는 사람을 정의할 수 있는 정체성이 되었고, 선택의 갈림길에서 손을 잡아끌었으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미래의 배우자 상도 설정해주었고요.


‘결핍’이라고 하면 덜컥 부정적인 것부터 떠올렸는데, 그리고 우리 인생에 나쁜 쪽으로만 영향을 주는 건 줄 알았는데. 이렇게 생각해보니 자라는 동안 나만의 고유한 어떤 것들을 형성하는 거름 같은 역할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체성뿐만 아니라 생활 속의 작은 습관, 취미, 나만의 관례행사와 같은 형태로 표현될 수도 있겠지요.




이제 슬슬 글을 마무리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쯤에서 글을 쓴 진짜 목적이자 제가 하고팠던 말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결핍은 무엇이었나요?”


어렸을 적 결핍이 현재 당신의 삶에서 어떤 형태로 발현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한 번쯤 생각해보고,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셨으면 해요. 결국 ‘잘 산다’는 건 특별한 게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얼마큼 잘 데리고 사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일단 나를 잘 '아는' 것이 잘 살기 위한 첫 발걸음이 되리라 믿습니다.

여러분 모두 잘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저 또한 이 시기를 스스로 잘 살아내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잘 살았으면.

씩씩하게 지냈으면.

부디 그러기를.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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