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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란 Oct 31. 2020

에디터님에게

처음으로 마주한 '어른다운 어른'의 형상

처음으로 마주한 ‘어른다운 어른’의 형상ㅇ 새ㅅㅅㅅTO

                                                                        

TO 에디터님에게




안녕하세요 에디터님. 날이 점점 추워지고 있는데 잘 지내고 계신지요. 부산도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져 이젠 제법 두꺼운 겉옷을 내어 입어야 할 거 같아요. 아마 서울은 여기보다 훨씬 춥겠죠? 2년 전 겨울, 함께 밥을 먹으러 이동할 때마다 ‘서울은 도대체 왜 이렇게 추운거야’ 하고 앓던 소리를 내던 저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에디터님, 언젠간 제가 당신에게 장문의 편지를 쓸 거라고 그랬죠.

이제 그 말을 지킬 때가 된 거 같아 이렇게 몇 글자 적어 봅니다.      


당신과 관련된 글을 써야겠다, 처음 생각한 건 아마 그때였던 거 같아요. ‘모든 에디터님들이 글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당시 저는 학생에디터로서 잡지에 실릴 콘텐츠를 기획하고 원고를 작성해갔고, 당신은 제 담당에디터가 되어 기획안과 원고의 전체 디렉팅을 맡으셨죠.      


원고 초안을 보내고 나면 항상 몇 시간 내로 에디터님의 피드백이 담긴 파일이 뿅! 채팅창에 나타났던 게 기억나네요. ‘수정사항이 잔뜩 있으면 어떡하지?’ 파일을 확인하기 전 매번 조마조마 가슴 졸이던 것도요. 그렇게 긴장한 채로 파일을 열면, 항상 파란색으로 표시된 문장과 그 옆 괄호 속 다시 파란색으로 적힌 수정가이드가 보였는데. ‘여기에는 이런 사례가 필요합니다’ ‘상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풀어서 묘사해주세요’ 같은.     


실은, 처음엔 그저 정신없이, 호다닥 글을 고치기 바빴어요. 그래서 꼭꼭 정갈히 적어 놓은 그 피드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기껏해야 눈치 챌 수 있었던 건 자극적인 빨강이나 밑줄이 아니라, 최대한 부드럽게 풀어낸 말투 위에 말랑한 파랑을 얹어 지시사항을 전달했다는 것. 거기에서 당신의 센스와 따뜻함을 엿보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12월의 어느 겨울날, 우연한 계기로 모든 에디터님들이 당신처럼 섬세한 피드백을 제공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다른 학생에디터와 함께 일하는 에디터님들은 대부분 수정사항이 생기면 원고를 직접 고치신다고. 그래서 자기가 처음 쓴 원고와 잡지에 실린 글이 많이 다른 경우가 종종 생긴다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제가 최종 제출한 원고가 항상 그대로 지면에 실렸기에, 다른 팀들도 그런 줄로만 알았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 다른 회사에서도 일을 해보니 그게 일반적인 경우였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상사는 일일이 피드백을 주지 않더라고요. 특히 마감 시간이 엄격히 정해진 업계에서는 더더욱.      


저는 그제야 깨달았어요. 한 줄 정도 마무리 문장을 덧붙여야한다거나, 호흡이 긴 문장을 둘로 나누라거나. 그런 아주 간단한 사항조차 괄호 속에 담아 피드백으로 남긴다는 건,      


글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내게 주는 일이였음을.
나의 고민과 노고가 배인 문장들을 최대한 그대로 결과에 반영시키고자 했던, 깊은 사려였음을.     


시간이 조금 더 흘렀을 무렵엔 당신이 피드백을 보내기 전 ‘어떻게 해야 애들이 상처 받지 않으면서 내 의도를 잘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는 것도 누군가에게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무척 고마웠어요. 그래서 나도 언젠간 저런 상사가 되고 싶다, 생각했죠. 후배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단단히 방향을 잡아주는, 스스로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하지만 당신의 행동이 제게 커다란 울림으로 닿은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건 바로 머릿속에 막연히 자리 잡고 있던 ‘어른다운 어른’의 형상을, 당신이 처음으로 제게 보여주었기 때문이에요.     


보통 ‘어른’이라고 하면 다들 어떤 모습을 떠올릴까요? 책임감과 리더십, 의연함, 인자한 모습···. 제각기 다르겠지만, 저는 상대방을 향해 뻗어있는 고민과 망설임, 주저함의 흔적들, 나의 위치에서 줄 수 있는 다정. 그리고 그 고민과 다정을 엮어 이정표를 만드는 행동. 그런 상대방을 향한 차곡차곡한 마음의 결들이 제가 생각하는 어른의 형상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왜, ‘지쳤을 때 나오는 모습이 그 사람의 본모습이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데 에디터님은 매주 급박하게 몰아치는 마감의 굴레에서도 한 번도 피드백을 건너뛰신 적이 없어요. 대충, 성의 없게 보낸 적도요. 항상 부드럽게 정돈된 문장으로, 사소한 것들까지 놓치지 않고 짚어주셨잖아요. 5개월 동안 빠짐없이 꼭 그러셨어요(심지어 참고할만한 콘텐츠나 문체까지도 링크로 정리해서!).     




처음으로 에디터님과 밥을 먹던 날, 식사 후 자리에서 일어서며 에디터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항상 내 언행에 대해 생각하는 것 같아. 자꾸 돌아보려고 해.” 그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음, 좋은 어른이 될 자질이 충분하군.’ 하핫, 조금 건방지게 들렸나요? 하지만 진짜로 저는 줄곧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선 자신을 끊임없이 돌이켜 볼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어른이라는 게 뭔지도 잘 모르면서 그 인식만은 선명했습니다. 우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무언가에 대해 잘 돌이켜보지 않게 되잖아요. 피곤하니까. 그거 말고도 걱정거리가 산더미인데, 회사 다녀오면 이미 녹초가 되어 밥 먹는 것도 힘이 든데, 복기는 무슨.

     

다 피곤하고 귀찮아서 찜찜했던 과거의 상황에 대해, 자신의 언행에 대해, 지나간 하루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요. 그저 한쪽으로 치워놓고 얼른 흘려보내 버립니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타인과 나, 나를 둘러싼 일상과 환경에 대해 점점 무뎌지고 무감해지는 거죠. 자연스레 생각이 굳어지고 고집도 세지고. 자꾸 내가 보고 싶은 것들만 보고 싶은 방향으로. 가랑비에 옷 젖든 서서히.      


그래서 의지와 에너지를 사용해 스스로를 종종 돌이켜보는 것이 좋은 어른의 필수 요건이라고 여겼어요. 생각은 말랑하게, 언행은 무례를 범하지 않는 선에서, 나와는 다른 세대와 존재를 유연하게 수용할 수 있도록.     




전에 제가 직접 얘기한 적 있죠? 학생에디터가 되기 전부터 저는 당신의 오랜 팬이었다고. 해당 잡지를 일 년 동안 매주 빠짐없이, 대학 건물 입구에서 한부씩 집어 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고. 이번엔 누가 어떤 글을 썼나, 들떠서는.      


그 중에서도 에디터님이 연재했던 에세이코너 <소심이의 소심한 생활>을 무척 애정 했습니다. 한날은 거기서 칭찬에 관한 글을 읽은 적 있는데, 그 편은 어떤 계기로 인해 에디터님이 ‘칭찬에 후한 사람 되기’를 목표로 세우면서 깨달았던 것에 대한 기록이었어요.     


당시 에디터님은 ‘자존감 요정’ 역할을 자처하며 누군가의 작은 장점도 큰 소리로 칭찬하셨죠. 그런데 한 tv 프로그램에서 mc가 특정 게스트에게 칭찬세례를 퍼붓는 모습을 보고 생각을 바꾸셨다고. 왜냐하면 칭찬 받는 친구 옆에 서서 멀뚱히 박수만 치던 또 다른 게스트의 얼굴이 내내 마음에 걸렸으므로. 그래서 목표를 조금 틀어 ‘칭찬에 후한 사람이 되자. 단, 칭찬은 귓속말로 하자.’로 수정하셨다고.     


보통 선한 마음을 품고 누군가에게 이로운 일을 하는 상황에선, 그런 일을 행하는 ‘기특한 나’에게 심취되기 마련이잖아요. 그래서 칭찬세례를 받는 사람의 행복한 얼굴을 더 중점적으로 눈에 담게 되고. ‘역시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어’ 되새기면서.      


그런데 에디터님은 프레임 바깥에 오도카니 남겨진 이의 얼굴을 ‘발견’하셨어요. 그 사람이 그때 그곳에 어떤 표정으로 존재했는지를. 그리고 지난날의 언행에서 스스로 오류를 짚어내고 방향을 수정할 수 있었죠.

그래서였나 봐요. 제가 얼굴도 모르는 당신을 좋아할 수 있었던 건. 에디터님이 그런 어른이어서.     


에디터님. 저는 아직도 어른다운 어른이 무엇인지 명쾌하게 답할 수는 없을 거 같아요. 아직 알아가는 중이거든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 하지만 당신이 그 형상 중 하나를 단단히 보여주었으므로, 저도 조금씩 그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 볼게요. 자주 돌아보고 자주 망설이면서. 수정과 깨달음을 거듭하면서 취향과 소신을 만들어 갈게요. 관계 속에 따뜻함을 쌓아볼게요.


 그 첫 번째 발걸음이 이 편지가 되기를 바라면서.


다시 만나는 날까지 씩씩하게 지내다 건강히 만나요.  

2020 가을 예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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