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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란 Feb 12. 2019

누구나 꼭 봐야할 필수교양
같은 영화, <가버나움>

아이의 마지막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무언가 안에서 후두둑 무너져 내렸다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


세상에는 자신이 보고 싶은 영화 외에도, ‘꼭 봐야만 하는’ 영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가버나움>은, 당연 그 중 하나이리라 확신합니다. 



영화는 출생기록조차 없는 12살 난민소년, ‘자인’을 통해 시리아난민들의 열악하다 못해 짓물러진 일상을 보여줍니다. 그 속에는 조기결혼, 아동성매매, 아동밀매와 같은 악질적인 범죄가 바이러스처럼 만연하게 퍼져있습니다.                  

                        

영화는 이 모든 모습들을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카메라에 담습니다. 비극을 구태여 과장하지도, 그렇다고 지독한 현실을 미화시켜 표현하지도 않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필요한 만큼의, 알아야할 만큼의 슬픔과 비극, 삶의 모습을 조용하고 차분한 방식으로 조명합니다. 그래서 영화엔 소위 말하는 ‘신파’가 없습니다. 가슴을 쥐어짜는 바이올린 선율도, 아이가 비명을 지르며 오열하는 모습도, ‘구원’을 애원하는 손길도 없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떨기보다는, 대부분의 장면에서 자인은 무심하고, 무감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희망’, ‘설렘’과 같은 단어들과는 정반대편에 있는, 아니 애초에 그런 단어들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모르는 눈을 한 채로요. 
     
그래서 마지막장면에서 아이가 짓던 그 표정이 더욱 가슴 아프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는 문장이 그저 ‘애통’을 나타내는 상투적인 표현인줄로만 알았는데. 
아이의 마지막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무언가 안에서 후두둑 무너지며 동시에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런 예고도, 경고도 없이 그냥 그렇게, 갑자기요. 결국 물먹은 종이처럼 뺨이 흐믈흐믈 해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울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나의 노력이나 행동으로 얻어낸 게 아닌, 그저 90년대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그러니까 단지 '운'이 좋아 자연스레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세상 저편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마치 옛날부터 전해져오던 ‘카더라’식의 이야기처럼 대하고 있었던 제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자인이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 세상에 살아있지 않은 아이가 아니 듯, 보이고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일이 아닌데 말입니다.    


사는 게 지옥이에요. 인생이 좆같다고요.  
다음에 태어날 아이도 나와 똑같은 인생을 살 거예요.
존경받고,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신은 그러길 원하지 않으시죠. 
우리가 땅에 짓밟히길 원해요.

-영화 속 자인의 대사 中-


한 편의 영화가 상황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사람들이 이야기를 시작하거나 생각하게 도울 수 있다고 확신하던 나딘 라바키감독. 그녀의 말처럼, 영화<가버나움>은 그럴만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또한, 영화를 보고나서 이에 대해 무슨 글이든 써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습니다. 더 부끄러워지기 전에요. 

그러니 바라건대, 상영관에 걸려있는 동안 제 주변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친구의 친구까지도 이 영화를 꼭 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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