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예란 Feb 16. 2021

그렇게 꼰대가 된다.


병원 접수를 기다리던 중이었을 것이다. 의자에 앉아 멍하니 앞을 보고 있는데, 접수대에 한 중년의 아저씨가 보였다. 아저씨는 접수대에 한쪽 팔을 올려놓고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배를 불툭 내놓고 짝 다리를 짚고 있었다. 인상을 팍 구기며 짜증스레 무언가를 말하는 아저씨를 보면서, ‘오~ 엄청난 꼰대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생각했다. 초면에 미안하지만 아저씨는 정말로 전형적인 꼰대의 외형을 하고 있었으므로 선뜻 무례하게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예상보다 길어지는 접수 시간에 나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아, 왜 이렇게 오래 걸ㄹ···’까지 마음속으로 말하다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까 그 아저씨와 똑같은 자세로 서 있는 스스로를 깨달았기 때문이다(그것도 미간까지 구긴 채로!). 오래 기다리다 보니 몸은 자연스레 접수대 쪽으로 기울었고, 한 쪽 다리에 체중이 실렸다. 표정에는 성급함과 지친 기색이 얼마간 드러났다. 나는 방금 전 타인에 대한 성급한 판단을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아, 이 자리에 오면 누구라도 이런 자세, 이런 표정이 되는 구나···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나는 절대 저러지 말아야지.’ 하던 무언가를, 세월이 흘러 자연스레 하게 되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예컨대 스물일곱의 나는 ‘후에 할머니가 되어서 절대 누빔 잠바를 걸친 채 꽃무늬 백팩을 고 두 손에는 파나 나물 따위가 들은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하지만, 정작 그 나이가 되어선 누빔 잠바만큼 편한 옷은 없으며 꽃무늬가 제일 세련됐다고 느끼며 시장에서 값싸게 산 싱싱한 채소 따위를 뿌듯해하며 들고 다닐지도 모를 일이다. 또는 내가 할머니가 되었을 쯤 고용시장이 활성화 되어 취업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시대가 온다면 ‘요즘 애들은 취업하기도 쉬운데, 뭐 그리 불만이 많아.’라며,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 할 수도 있겠지.     


유시민 작가는 저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이런 말을 했다.     


아무리 건강해도 노화를 막지는 못한다. 나이가 들면 신경세포인 뉴런의 수가 줄어들며, 뉴런 사이의 정보 전달을 돕는 화학 물질 분비도 원활하지 않게 된다. 뇌의 정보처리 능력이 떨어지고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둔감해진다. 익숙한 것에 집착하고 고집을 부리거나 화를 잘 내게 된다. 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새로운 문제가 등장하면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증략)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덜 진보적 또는 더 보수적으로 변한다. 진보적인 젊은이가 보수적인 노인이 되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 한때 “민주 쟁취, 독재 타도”를 외치던 젊은이들이 후에 박근혜를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태극기 부대가 되는 것처럼.     

 

나는 이 부분을 읽다 페이지 한쪽 모서리를 작게 접어놓았다. 부정하고 싶은 무시무시한 말이지만 과학에 근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그런 식으로 꼰대가 된다.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럽게 말이지.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받아들이데 둔감해지고, 익숙한 것에 집착하며, 고집을 부리거나 화를 잘 내게 된다고.



좋아, 그렇다면, 어차피 꼰대가 될 거라면, 적어도 이런 꼰대는 되지 말아야지 하는 자신만의 기준이 필요할 거 같다(왜냐하면 최악의 꼰대는 너무 슬프니까). 그러므로 나는 일단 그 첫 번째 기준을, ‘남의 서사는 궁금해 하지 않고 자신의 말만 하는 꼰대는 되지 말자’로 정했다.     


전에 기차 안에서 옆자리에 앉아 있던 노인 분이 3시간가량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나와 아무 상관없으며 전혀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그는 내릴 때까지 쉴 새 없이 읊어댔다. 나는 ‘아··· 예··· 그러셨구나.’ 기계적으로 리액션을 하며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정말이지 고역이 따로 없었다고.     


나는 그 노인을 통해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경험에 의존해서만 이야기를 하게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그러니까 자꾸 과거로밖에 나아갈 수 없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는 것을. 그러므로 나는 되도록 입은 닫고, 귀는 열어놓는 꼰대가 되자고 다짐했다. 생각이야 어떻게 하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노력하면 그리 될 수 있을 테니까.


다시 유시민 작가님의 말씀을 빌려오자면, 그는 김대중 대통령이나 넬슨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 문익환 목사와 리영희 선생 같은 분들은 나이가 많이 든 후에도 철학적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발전시킨 인물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분들의 공통점은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젊은 사람들과 수평적으로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고. 그렇기에 이 분들은 나이가 많이 들어도 변함없이 개방적으로 생각하며 유연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고.


나는 그분들만큼 훌륭한 인물이 아니기에 그리 될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지금부터 노력은 해봐야 하지 않겠어? 그러니까 남의 서사를 궁금해 하고 귀 기울여 듣는 연습을. 그래서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도 자연스럽게 그런 태도가 몸에 배어나올 수 있도록. 그리하여 시도 때도 없이 조언을 하는 게 아니라, 젊은이들이 조언을 구한다면 그때 조심스럽게 조언다운 조언을 하는 거야. 그럼 적어도 ‘덜 꼰대’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러니까 결론은, 병원 접수대에서 만난 아저씨 미안해요. 누빔 잠바 차림에 백팩을 고 야무지게 걸어가던 할머니 마안합니다. 저도 언제 그렇게 될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기차에서 만났던 할아버지, 저는 할아버지처럼 되지는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저는 지금부터 남의 서사를 더 자주, 더 깊게 듣는 연습을 바지런히 할 거거든요. 이렇게 글을 쓰면서요!          



작가의 이전글 내 묘비명은 이렇게 적어주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