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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란 Aug 09. 2022

아빠가 진짜로 지키고 싶었던 건

나는 그의 등을 보며 마음속으로 못 다한 인사를 한다

    

초등학생 때 수술을 한 적이 있다. 코 내부에 물혹이 생겨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나이가 어려 그때 전신마취를 했는데, 마취상태에서 나는 애타게 아빠를 찾아댔다고 한다. 수술실 밖에까지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아빠를 부르짖으며 엉엉 울며 팔다리를 휘저었다고. 그때 수술실 바깥에 있던 엄마도, 수술하시던 선생님도, 그리고 마취에서 깨어나 이 얘기를 전해들은 나도 깜짝 놀랐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 아이들은 엄마를 많이 찾기도 했으며, 더군다나 나는 아빠와 데면데면한 사이여서 내가 엄마가 아닌 아빠를 찾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유년기 때도 그랬다. 나는 항상 엄마 곁에 찰싹 붙어 다니던 아이였는데, 무섭거나 불안감을 느끼면 어느 샌가 아빠에게 쪼르르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악몽을 꿨을 때, 무서운 얘기를 들었을 때, 도둑이 우리 집에 들어올까 무서울 때, 나는 항상 아빠 품으로 꾸물꾸물 들어가 그의 체온을 느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그가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 가족을 지켜줄 것만 같았다. 나쁜 악몽으로부터, 귀신으로부터, 도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힘 쌔고 멋있는 우리 아빠. 어린 나에게 있어 아빠는 존재만으로도 이루 말할 수 없는 든든함과 안정감을 선사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아빠가 언젠가부터 작아지기 시작했다. 열 살 무렵부터였나. 그가 시작한 사업이 점점 어려워지고, 그에 따라 밤마다 엄마와 아빠가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횟수가 늘어갔다. 어느새 나는 매일 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그들의 고성을 들으며 잠이 드는 일상이 익숙해져갔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더 쪼그라들었다. 첫 번째 사업이 망하고, 두 번째 사업을 다시 시작하고, 또 다시 망하고, 세 번째 사업까지 구렁텅이로 처박히는 동안 그의 등도 점점 굽어갔다. 어렸을 땐 그렇게 넓게만 보였던 등이 이제 한없이 초라하다. 그는 지쳐갔고, 우리 가족은 피폐해졌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를 열심히 미워했고, 원망했으며, 동시에 가엷고 불쌍히 여겼다.



그러던 중, 오랜만에 본가에 들렀다. 저녁을 먹으려고 냉장고를 열었는데 와인이 있었다. 당장 안주와 함께 홀짝홀짝 마시고 싶어 와인 오프너로 따려고 하는데,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분명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은데 자꾸만 힘의 방향이 엇나가고, 균형을 못 맞추겠고, 코르크는 빠질 기미가 안보이고. 결국 엄마와 나는 좌절하며 아빠가 퇴근하기까지 기다렸다. 낑낑대며 힘을 줘도 잘 따지지 않던 와인은 아빠의 능숙한 손놀림으로 단번에 해결됐다. 나는 손뼉을 짝짝 치며 와아, 우리 아빠 멋있다며 그를 칭찬했고, 엄마는 맞아, 우리가 못하는 걸 아빠가 척척 해줄 때 멋있어, 라고 말하며 옆에서 거들었다. 아빠는 뒷목을 쓸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얼굴을 보다가 문득 옛날의 아빠의 모습을 떠올렸다. 항상 반듯하게 펴져있는 등, 우리가 무서워하는 것들을 척척 대신해주던 손, 다리가 아파 매달릴 때면 항상 번쩍 들어 올려 안아주던 품, 우리가 모르는 것은 무엇이든 다 알려 주는 똑똑한 입술과 수학을 능숙하게 풀어내는 모습, 원어민과 막힘없이 영어로 대화하는 모습 등이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겹쳐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아빠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아빠는 원래 이렇게 똑똑하고, 못하는 게 없고, 유능하고, 따뜻한 품을 가진 사람이었지. 아, 맞다. 그러니까 아빠는 원래 우리 가족을 지켜주던 사람이었지. 항상 우리 가족을 지켜내고 있는 사람이었지.


그는 항상 나를, 우리가족을 지켜냈다. 악몽으로부터, 무서운 수술로부터, 낮에 들었던 귀신 이야기로부터, 어쩐지 낯설고 무섭게 느껴지던 어른들로부터 어린 나를 지켜주었고, 엄마가 돈 걱정 없이 어린 아가들을 키울 수 있도록 세상의 풍파를 온몸으로 막아주었다. 세 번째 사업이 망하고 그가 일용직 노동자로 일했을 때, 즉 우리가족이 경제적으로 가장 힘들었을 때 그는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여 엄마의 요실금 수술비를 마련해주었다. 다른 거 말고 얼른 수술부터 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무리 힘든 상황 속에서도 우리 가족이 굶지 않게, 밖에 나가 살지 않게, 흩어져 살지 않게 어떻게든 자신의 몸을 혹사하여 세상으로부터 우리 가족을 지켜내었다. 


지금 그는 네 번째 사업을 시작해 여느 때와 같이 간신히 버티고 있다. 그가 이기적인 야심으로 다시 사업을 시작했든, 아니든 이제 그것은 중요치 않다. 다만 그가 지금 최선을 다해, 아니 할 수 있는 최선을 넘어 버티고 있는 이유가 우리 가족을 지켜내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그는 오늘 일이 많아 새벽 다섯 시 반에 사무실로 출근했다. 한숨을 푹 쉬면서 현관을 나서는 그의 등을 보며, 아빠, 다녀오세요, 라고 인사를 했다. 그는 언제나 들릴 듯 말 듯 무뚝뚝하고 짧게, 어. 라고 대답한다.


나는 그의 등을 보며 마음속으로 못 다한 인사를 한다. 아빠,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어서 고마워요. 오늘도 우리 가족을 지켜내기 위해서 푸른 새벽에 몸을 이끌고 나가 주어서 고마워요, 더 없이 사랑합니다. 당신의 든든한 품 덕분에, 오늘도 우리 가족은 무탈하고 평안한 하루를 보낼 거예요. 사랑해요, 감사해요, 늘 우리 곁에 있어줘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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