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 떠나야 보이는 것들
일본 에도시대(1603~1867)의 풍속화 ‘우키요에’는 19세기말, 서양 미술에 큰 흔적을 남긴 채색 목판화이다. 그중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는 단연 명실공히 일본 에도시대를 대표하는 우키요에 화가로, 모네와 반 고흐 등 서양의 인상파 화가들 작품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대표작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를 비롯해 다수의 작품은 그의 나이 70세가 넘어 그린 것들이다.
사납게 치솟은 파도의 물보라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이 작품에 큰 영감을 받았던 반 고흐는 자신의 대표작 ‘별이 빛나는 밤’의 소용돌이치는 하늘을 통해 그 기법을 표현했다. 작곡가 드뷔시도 호쿠사이의 이 작품에 감명을 받아 교향곡 ‘바다’를 완성했다.
이런 호쿠사이에게 매우 인상적인 것이 있었는데 바로 평생 동안 아흔세 번 이사하고 서른 번 넘게 자신의 호를 바꿨다는 점이다. “있는 곳에 물들지 말 것”, 그가 좌우명으로 삼은 신조다. 현실에 안주하며 정체되는 것을 싫어했던 그는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하며 현재’ 자신이 해야 할 일들에 ‘매 순간’ 집중하며 살았다. 지나간 과거의 일에 얽매이지 않았고 미래에 대한 괜한 불안으로 앞날을 걱정하지도 않았다.
거처를 새로 옮길 때마다 새로운 시선으로 주변의 사물을 바라보고 심기일전해서 자신 앞에 놓인 일들을 즐겁게 해 나갔을 호쿠사이의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진다.
한국에서 7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하는 적도의 나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머물고 있는 지금, 어쩐지 정감 가는 언어는 물론이거니와 멋진 카페들과 세련된 인테리어 센스들을 마주하며 나는 미처 몰랐던 인도네시아에 대해서 오늘도 새롭게 발견하고 감동한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모국인 한국에서 잠시 떨어져 나와, 온통 생경한 풍경과 언어와 사람들 사이에 놓일 때 우린 자기 자신에 대해 더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예전에 비정상회담 타일러가 했던 말이 인상적이었는데 ‘파란 점이 파란 바지에 있으면 눈에 띄지 않지만 하얀 바지에 있으면 비로소 돋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외국에서 자신의 정체성도 확연히 드러나게 되는 법이다.
전혀 다른 언어와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한국에서 모두들 좇고 있고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들에서 한 발짝 떨어져 나와 '내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 '내가 추구하는 삶'에 대해 더 집중하게 된다.
남들이 뭔가를 하면 따라서해야 할 것 같고 이게 유행이다 싶으면 모두들 우르르 대세처럼 따르는 한국의 분위기를 종종 느끼는데, 다른 언어를 알고 외국에 있다 보면 그런 것들에 의문이 생기고 좀 이상해 보일 때가 많다.
세상은 정말 넓고 저 우주에서 보면 대한민국은 그중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하고 우리 개개인은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니 내가 속한 사회나 주변인들의 시선에 휘둘리지 말고, 눈치 보지 말고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나가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외국에서 삶을 산다는 건, 나와 진정으로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자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어느 것 하나 당연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기회이기도 하다.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말하길, “장소는 우리가 그 장소를 특별하게 만드는 만큼만 특별해진다.”라고 했다.
긴 인생에 있어 잠시라면 잠시일 수 있는 몇 년간의 주재생활. 오랜 세월 머물러왔던 모국을 떠나 낯선 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지금이야말로 호쿠사이가 말한 ‘있는 곳에 물들지 않고’, 다시 한번 삶을 생동적으로 살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