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고시 3년을 헤메다 기자가 된 이야기
어쩌다 보니 블록체인 전문기자가 됐다. 처음부터 블록체인 분야에 관심이 컸던 건 아니다. 기자가 되고 싶었고, 이왕이면 전문기자가 되고 싶었다. 누구나 쓸 수 있는 단편적 기사 말고 나만 쓸 수 있는 심층 기사를 작성하고 싶단 욕심이 있었다. 대학 학부를 갓 졸업한 20대 청년이 특정 분야에 전문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막연히 전문기자가 되고 싶다고 꿈꿨을 뿐이다.
그래도 이왕이면 IT분야 전문기자가 되고 싶단 생각은 있었다. 학부 때 부터 관심있던 분야는 '미래학'이었다. 현재 기술을 바탕으로 미래 사회가 어떻게 변화할지 상상하고 논의하는 수업에 적극 참여했다. '소유의 종말' '바이오테크의 시대' 같은 제레미 레프킨 책도 열심히 찾아 읽었다. 정확히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학교 도서관에도 없던 비슷한 부류의 책을 잔뜩 사들였던 걸로 기억한다. 오죽하면 대학 때 기숙사 방을 같이 쓰던 친구가 "넌 미래학자가 될 것 같아"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때 우린 고작 스무 살이었다. 미래학자가 무엇인지, 미래학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진지하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던 시기였다.)
물론 현실은 팍팍했다. 금방 붙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아니었다. 기자가 되기까지 나는 3년이 걸렸다. 처음 별다른 준비도 없이 지원한 방송사 인턴에 덜컥 합격했던 게 화근이었다. 당시 개인적 일정이 있어서 합격하고도 출근은 하지 않았지만 그때 나는 오만함에 가득차 있었다. "준비 안하고도 합격했는데 준비하면 금방 붙겠는 걸"이런 오만함이었다. 오만함은 지속됐다. 준비를 시작하고 처음 지원한 방송사 공채에서 필기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카메라 테스트까지 단번에 가면서 나는 금방 기자가 될 것이란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러나 기자란 타이틀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언론고시 3년 차 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모 방송사 최종 면접에서 "어떤 기자가 되고 싶느냐"는 질문에 "IT전문기자가 되고 싶다"고 답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간 나의 학부 때 전공, 이력 등을 기반으로 실현 가능한 전문성을 강조해왔는데, 대뜸 솔직하게 답해버린 것이다. 면접관들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한 면접관은 내게 "야수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자라면 사회부 기자를 꿈꿔야지, 경찰서에서 마와리도 돌고 그래야 하는데 벌써부터 편한 것만 찾아서 되겠어?"라고 비판했다. 솔직히 할 말을 잃었다. 사회부 기자만 기자로 인정하면 굳이 다른 부서는 뭐하러 있는 건지, 타 부서에서 일하는 기자들은 야수성이 없어서 기자로 안 쳐준다는 이야기인지 되묻고 싶었다. 경제지는 언론도 아니냐고 비판하고 싶었다.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내 표정에서 불쾌함이 분명 드러났을 테다.
면접 끝나고 밖에 나와서 울었다. 그것도 아주 펑펑. 내가 기자가 되고 싶다는데 왜 당신들이 뭐라하는지 화가 났다. 결국 나는 그 면접에서 떨어졌다. 합숙 면접까지 거쳐 올라갔던 최종 관문인 만큼 실망감도 컸다. 무엇보다 야수성이 없다는 지적이 타격이 컸다. 이만큼 했는데도 안 된 건 내가 그들이 말하는 야수성이 없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고리타분한 생각을 갖고 있는 조직은 나와 맞지 않는 곳이란 판단이 섰다. 대학에서 진행하는 일반 기업 취업 캠프를 신청했다. 언시용 자소서를 일반 기업 용으로 다듬었다. PT면접을 준비하고, 다트에서 공시를 보며 기업 정보를 정리했다.
재미가 없었다. 꾸역꾸역 해내는 날이 반복됐다.
그러다 공고를 봤다. 블록체인 '전문매체'에서 '전문기자'를 뽑는다고 했다. 블록체인은 상식 공부를 하며 여러차례 봤던 용어였다. 사실 그간 나는 이른바 주요 언론사에만 지원했다. 작은 매체에는 지원하지 않았다. 3년째 떨어지면서도 그 오만한 태도는 바뀌질 않았다.(과거로 돌아간다면 한 대 쥐어박고 싶다.) 어쨌든 그런 오만한 나에게 '전문기자'란 타이틀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블록체인은 내가 예전부터 관심 있어하던 미래를 바꾸는 기술 아닌가!
그렇게 나는 3년을 돌고돌아 블록체인 전문기자가 됐다. 처음 만나는 취재원이 원래부터 블록체인에 관심이 많았냐고 물으면 이 기나긴 이야기를 할 수 없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라고 줄여 답한다.
p.s
기자 생활을 하면서 당시 면접관이 말했던 야수성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일하다 보면 모르는 사람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어야 하고, 대뜸 찾아가기도 해야 한다. 주눅들지 않고 해야 할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슈를 끝까지 파고들려면 때로는 뻔뻔해져야 한다. 거리를 두고 비판적 시각을 유지해야 한다. 뭐 이런 의미에서 야수성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물론 나는 경찰서 마와리를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면접관이 말한 야수성을 충분히 이해하진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