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1막의 끝에서 느끼는 점

회고

by 예림 RINA
최근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 전달해주신 당시 썼던 플래너.
추억이 새록새록하다.


2024년 기준 대한민국 여자 평균 기대 수명은 약 87세라고 한다. 이를 기준으로 인생을 세 막으로 나누어본다면, 1막(0~29세) / 2막(30~58세) / 3막(59세~87세)이 될 것이다. 28살, 인생 1막의 끝에 서 있는 지금, 내 인생의 1막은 어떠했는지 회고하고 앞으로를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해본다.


내 인생 1막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

1. 초등학생 때 살았던 빨간 벽돌 이층주택 옥탑방. 작은 거실과 안방, 작은 방 하나가 있는 집이었고 안방에는 장롱과 전에 살던 집에서 가져온 피아노가 하나 있었다. 초록색 페인트로 칠해진 집 옥상에서 강아지 한 마리를 키웠던 기억이 있다. 그 강아지가 싸놓은 똥 냄새를 맡으며 등하교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거실에서는 어머니와 할머니가 자주 과일을 깎으며 이야기를 했었고, 오빠는 늘 친구들과 노느라 집에 잘 들어오지 않곤 했다.


2. 중학교 즈음 이사한 LH의 한 공공 아파트. 이 아파트는 2011년부터 살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엄마가 살고 있는 곳이니 역사가 꽤나 깊은 곳이다. 처음 이사를 했을 때, 가족 모두 크게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보일러가 잘 작동되고, 주차장과 엘레베이터가 있어 경사 높은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좁은 골목길이 아닌 아파트 단지가 있다는 것. 지금은 당연하지만 당시엔 결코 당연하지 않았던 것들이 우리 가족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주었었다.


3. 문산여고 입학. 엄마가 아침마다 마티즈를 끌고 학교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은 들이지를 못해서 겨우 세수하고 덜 마른 머리로 엄마 차를 타고 학교에 가곤 했었다. 사소한 일상이지만 그 때 엄마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거 같다. 그 때는 엄마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걱정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는데, 요즘은 그렇지 못하다. 엄마한테 더 자주 연락해야겠다.


4. 고등학교 시절 매일 가던 독서실 내 자리가 생각난다. 자리에는 매일의 공부 계획이 빼곡히 적힌 플래너와 힘들 때마다 적어두었던 어디선가 본 명언들이 있었다. 대충 '나는 엄마의 꿈이자 아빠의 자랑이다' 이런 문구였던 거 같다. 고등학교 때가 인생에서 가장 성실하게 살았던 시기가 아닌가 싶다. 특히 고1 때는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었다. 물론 가장 공부 안 했던 건 역시 고3 때다. 독서실 같은 건물 한 층 아래에 있던 당구장도 자주 가고, 코인노래방도 종종 갔었더랬다.


5. 그래도 서울대학교 합격했던 순간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발표일 하루 전 날, 꿈이 뒤숭숭해서 잠을 설쳤었다. 발표일, 연세대-서울대-고려대 순으로 발표가 난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수만휘라는 카페에서 만난 동일 학교/전형/전공을 쓴 친구가 발표가 났다며 연락이 왔고, 본인은 예비번호를 받았다고 했다. 나도 큰 기대를 안하고 합격창을 열었는데, 연세대 합격 문구가 보였고 어안이 벙벙해서 바로 엄마에게 전화해서 소식을 알렸다. 곧 이어서 서울대학교 발표가 났는데, 기대를 조금도 안했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이미 연세대 붙은 상태여서 '떨어져도 연세대 가면 되지 뭐' 하는 마음으로 합격 창을 열었다가, 믿기지가 않아서 한동안 몇 번이나 합격창을 다시 봤었다. 곧 바로 엄마, 학교 선생님들,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고 고맙게도 친구들이 집에 와서 다 같이 축하해줬었다. 친구들의 부모님들까지 축하해주셨는데 정말 감사했다.


6. 서울대학교 입학, 모든 게 낯설고 설레었다. 기숙사 취사실에서 밤새 수다 떤 일, 기숙사 당구장에서 자주 당구 친 일, 그러다가 친해진 친구들과 색다른 경험을 해보고 싶어 벌인 여러 프로젝트들, 신입생 때 뭣도 모르고 들어간 대학원 학회에서 선배들과 함께 논문 쓰며 공부했던 일. 밤새 토론했던 숱한 날들까지. 대학생의 나는 열린 토론을 하길 좋아하고, 다양한 주제를 배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보다 훨씬 무모하고, 앞 뒤 안 재고 일단 해보자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대학생 때 자주 한다는 미팅, 주점 등에는 거의 가 본 기억이 없다. 단순히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게 아니라 흥미로운 일을 꾸미는 게 재밌었다.


7. 인턴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어설픈 사회생활. 첫 회사는 관악에 있는 작은 스타트업이었는데, 학교와 병행하며 일을 했다. 작은 스타트업인만큼 체계가 있는 곳은 아니었고, 회사 안에 여러 분쟁들이 있어 처음 사회의 쓴 면을 체감했었다. 그런데 그 뒤에 갔던 VC 인턴에 비하면 이건 귀여운 수준이었다. 조직의 한 구성원으로서 능력을 입증하지 못했을 때 냉정해지는 사회를 느꼈고 능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 당시나는 아직은 사회인이 덜 된, 어린 대학생의 모습이었던 거 같다. 그 후 입사한 한 스타트업에서 영업, HR, 마케팅, 개발(찍먹)을 해 보면서 진심으로 일에 몰입할 때의 쾌감과 즐거움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일과 삶의 균형이 깨질 때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지, 스스로와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돌볼 수 있을 정도의 마음의 여유를 갖는게 중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8. 그 이후는 비교적 최근이라서 기억이 생생한데, 현대차에 입사했다. 대기업에 입사하게 될 줄 몰랐던 내가 대기업에 입사했고, 한 조직의 막내가 되었다. 이전 직장에서는 나이나 직급/연차 타이틀 떼고 개인사업자처럼 일을 해오던 환경이었기에, 처음 해 보는 조직생활과 신입이라는 이유로 받는 애기 대우가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또 나쁘지 않았다. 현대차에 입사하고 나서 나의 삶 전반이 크게 안정화되었다. 물론 경제적으로 이전 계약직과 달리 정규직이 주는 안정감이 매우 컸지만, 정서적으로 큰 집단에 소속되었다는 안정감도 한 몫 했다. 퇴근 후에 헬스나 크로스핏, 요가 등의 취미생활을 하고 처음 일에 적응하던 몇 달 빼고는 타임 매니징도 유연히 할 수 있어서 훨씬 여유가 생겼다.


인생 1막을 회고해보면서 느낀 점

1. 참 열심히 살아냈다. 순간 순간 최선을 다 해서 참 나답게, 열심히, 모든 것들을 기꺼이 경험했다. 아프고, 힘들고, 괴로웠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그저 귀엽다. 뭐 얼마나 인생 한 번 대단히 잘 살아보겠다고 그렇게 발버둥 쳤는지. 그런데 그렇게 발버둥 치고 헤맸던 만큼 그게 내 땅이 된 거 같아서 대견하고 잘 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2. 지금의 나는 꽤나 안정적인 상태다. 인생을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깊은 우울에 빠지지 않고 한층 여유가 생겼다. 20대 초반에 '30대가 되면 여유가 생길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했던 적이 있다. 그때는 30대에도 지금처럼 괴롭고, 힘들 거라고 생각했었다. 막상 30대를 앞두고 있는 지금, 결국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을 느낀다. 괴로운 일도, 힘든 일도, 모든 건 다 지나간다.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은 지금 이 순간을 생생히 즐기고, 아쉽거나 후회가 남는 일도 크게 자책하지 않고 흘려보내주는 일이다.


앞으로 인생 2막을 앞두고 느끼는 점

1. 건강하자. 건강이 최고다. 너무나 당연하게 알고 있는 명제지만, 일상에서 지키기 참 어렵다. 운동을 꾸준히 하고, 건강한 것을 먹고, 잘 자고, 푹 쉬는 것.

요즘은 요가를 주 3회 꾸준히 하고 있다. 이제 한 지 3개월 정도 되었는데 몸이 많이 좋아지고 있다 느낀다. 80대까지 꾸준히 요가 하는 게 목표다. 일상적으로도 스트레스가 많은 손목이나 목을 자주 풀어주자.

건강하게 먹어야 된다. 사실 평일 점심은 별다른 약속이 없으면 샐러드를 먹고 있긴 한데 주말은 어김없이 무너지고 만다. 저녁도 마찬가지로, 포케 먹는 날도 있지만 떡볶이, 역전우동 같이 맵고 자극적이어서 위에 부담을 주는 음식들도 많이 먹는다. 이런 것들을 서서히 고쳐가야된다.

잘 자는 건 지금처럼만 하면 될 거 같은데, 너무 잘 자서 문제다. 아침에 너무 늦잠자서 회사에 늦게 가는 일이 종종 있다. 지각까지는 아니지만, 웬만하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들이는 게 좋을 거 같다. 이상적으로는 월/수/금 주 3회 아침 7시 요가 수업을 듣는 것인데, 번번이 실패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지켜보려고 노력해봐야겠다. 10시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푹 쉬는 건, 요즘 들어서 잘 못 지키고 있다. 나는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혼자서 아무 것도 안하고 집에서 푹 쉬는 시간이 필요한 거 같다. 근데 요즘은 약속이 너무 많아서 혼자 있을 시간이 좀 부족했다.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좋지만, 외부 약속을 좀 줄이고 스스로 회복하는 시간을 좀 가져야겠다.


(2) 나 자신에게 친절하자. 10대와 20대 중반까지 많은 방황을 하면서 느낀 점은, 너무 예쁘고 어린 나이에 지나치게 많이 우울했다는 것이다. 지금에서야 비로소 마음의 여유를 찾은 거 같다. 이러한 삶의 여유와 안정을 가지고 하루하루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기꺼이 경험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


(3) 주변 사람들에게도 친절하자. 특히 가족에게 잘 하자.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가장 자주 연락을 못 하고 친절하지 않게 대하게 되는 거 같다. 엄마가 요즘 갱년기 때문인지 자주 외로워하시는데, 시간 내서 자주 안부 묻고 집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번에 엄마 모시고 같이 나트랑 여행을 다녀오게 된 거다. 엄마랑 같이 행복한 시간 보내고 오고 싶다.

내 주변에서 늘 힘이 되어 주는 친구, 동료들에게도 잘 하자. 나도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고, 행복하게 대해주고 싶다 진심으로. 주변인들에게 베풀고 소중하게 대해줄 수 있도록 지금보다 더 많이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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