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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꽃 Jun 27. 2024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

폭풍 속에 나를 잃지 않도록

수술 이후 6개월,
내 삶의 폭풍 같은 순간들이 지났다.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르니 내 삶을 제3자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시선도 생겼고,
늘 꼬리표처럼 나를 따라다니던 죄책감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요즘의 나는 잠시 평화로운 이 순간들을 그저 느끼고 있다.
시골에 살면서 어떤 자극도 없고 고통도 없는 나날 속,
약간은 무료하지만 난 지금의 권태로운 내 삶이 그런대로 만족스럽다.
자연 속의 여유로움 속에 있다 보면 그동안의 고통이 잠시나마 사그라진다.
더불어 그동안 고통에 심취해있어 한 번도 마음껏 누리지 못한 날들 속에 잃어버렸던 행복을 서서히 되찾고 있는 듯하다.
 
 

한참 폭풍 속에 있을 땐 너무 고통스러워서 내 삶이 금방 끝나버리기만을 바랐다.
강력한 폭풍은 당시의 내게 불가항력의 힘이었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고통.
빠져나오려 할수록 더 옥죄는 풍랑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내겐 그 정도의 에너지도 없었고 내 상황들 모든 게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나 스스로 폭풍 속에 몸을 맡기고 그저 폭풍과 함께 휩쓸렸다.
유산으로부터 시작된 고통은 내 깊이 잠재되어 있던 우울을 끌어올리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고통들 속에 자꾸만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 순간에 나는 내가 영영 고통이라는 폭풍 속을 빠져나오지 못한 채 그 속에서 순환하게 될 줄 알았다.
처음엔 내가 위험한 상황이라 느껴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썼지만 그럴수록 내 슬픔 속에 더 빠져들었다.
결국 마지막엔 패닉 상태에 빠져 나 자신을 포기하고
그저 슬픔이 나를 휩쓰는 대로 휩쓸리는 것 밖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빠져나오려 할수록 내가 더 다친다는 걸 알았다.
때문에 고통에 심취해서 나도 아기를 따라 죽겠다며 몇 달 내내 아기를 지키지 못한 나 자신을 미워했고
아무도 내 잘못이라 하지 않았지만 나는 나를 증오하고 원망하며 끝내는 내 삶 자체를 부정하는 데에 이르렀다.
그때의 난 생기 하나 없이 뼈대만 남은 앙상한 나뭇가지가 되어 힘 없이 날 흔드는 폭풍 속을 떠다녔다.
 


그래도 시간은 꾸준히 지나갔고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지나 어느덧 유산을 한 지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처음 수술을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수술 후 6개월 정도 쉬고 임신을 하라고 했었다.
자궁이 회복되고 몸이 돌아오는 데에 그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여러 의미에서 6개월은 내게 수술 이후 다시 임신을 준비하기 위한 심리적 마지노선이었다.
사람들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임신을 시도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한 채로 시간이 지났고
6개월이 지나자 조바심은 여전했지만 내가 바라보는 지난 유산에 대한 시각들도 조금씩 바뀌었다.


"이 과정도 건강한 아이를 만나기 위한 과정이다,
나부터 강해지고 내 하루를 사랑하자,

일단 망가진 나부터 돌보자. "


죽음에 골몰하고 있기보다는 서서히 나를 위한 생각들을 갖게 해주었다.
사실 그런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려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나에겐 짧은 시간이었지만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한참을 폭풍 속에 휩쓸리다 드디어 만난 평화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는 너무 황폐하고 만신창이라 나를 다시 다듬고 보살피는데 앞으로의 많은 시간을 써야 할 것 같다.
사실 나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폭풍을 정말 벗어난 게 맞는지,
잠시 잠잠할 폭풍의 눈 속인 건지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이곳이 폭풍의 눈 속이라면 곧 다시 폭풍이 찾아와도 괜찮다.
언젠가는 폭풍은 지나가고 어딘가에서 소멸할 테니까.
폭풍을 겪은 건 내 잘못이 아니라 누구든 겪을 수 있는 일이었고, 그게 내가 되었을 뿐이라 생각하니 몇 달 만에 지독한 죄책감에서 조금 벗어났다.
그리고 조금씩, 내일을 살아가는 연습을 한다.
내일을 살아가는 연습을 하다가도

'내가 이럴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죄책감에 하루에도 몇 번을 눈물바람으로 울지만,
결국에 이것도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믿는다.
 


비바람이 불고 폭풍이 지나간 자리는 선물처럼 짧은 시간 예쁜 무지개가 자리 잡는다.
폭풍과 맞서 이겨낸 모든 풍경들은 평소보다 더 푸르게 빛난다.
나도 그렇다.
폭풍 속에 있을 땐 너무 고통스러웠는데 어느새 폭풍 속에서 살아갈 힘을 얻고 있었다.
죽음 앞에서 살아야 할 이유들을 찾고 있었다.
부디 이 순간이 지나고 내 삶에도 무지개가 떴으면 좋겠다.
내 삶의 폭풍의 끝에도 무지개가 남을 거고, 상처는 남겠지만 나는 더 굳세질 거라 믿고 앞으로를 살아갈 거다.
그런 믿음이 있다면 폭풍 속에서 고통스럽더라도 나를 잃지 않을 수 있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가고 난 이곳에도,
나는 아직 여기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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