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식에 대하여

by 어린

퇴근하고 12시에 집에 도착하면, 아니 정확히는 11시 30분에 회사를 나서는 순간부터 배가 고프기 시작한다. 나 저녁 뭐 먹었지? 먹긴 먹었나? 오늘 저녁은 스테이크 샐러드였고, 6시쯤 먹었다. 그래, 그건 샐러드잖아. 그리고 6시에 먹었고. 12시까지 일했으면 배가 고플 만도 하지. 내일 몇 시까지 출근해야 하지? 아침에 회의가 있었나? 머릿속에 생각들이 굴러가는 동안 이미 내 손가락은 쿠팡이츠와 배달의 민족을 스크롤링하고 있다. 지금 영업 중인 식당 중 베스트 음식점을 검토하고, 쿠팡이츠와 배달의 민족 중 어디 배달비가 더 싼 지 비교한다.


오늘의 야식을 먹을 핵심 이유는 저녁 메뉴가 부실한 샐러드니까, 로 정했다. 스테이크 샐러드여서 사실은 소고기가 꽤 올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샐러드긴 샐러드다. 하지만 사실 이건 변명이다. 왜냐? 샐러드가 아니고 순대국밥을 먹거나 햄버거를 먹은 날도 같기 때문이다. 그런 날은 “원래 이렇게 한 번씩 야식이 당기는 날이 있는 법이야. 이런 날도 있어야지.”와 같은 무적의 핑계를 생산한다.


하필 돈이 있는 것도 문제다. 많지는 않아도 매달 나에겐 월급이 통장에 들어오니까, 음식과 배달비 포함해서 2만원 정도는 쓸 수 있지 않나? 싶은 것이다. 낮 시간에 뭐 사 먹을 때는 1만 2천원인지, 3천원인지 다 따지면서 야식을 먹을 때만 급격히 가격에 관대해지는 것도 문제다. 어차피 반도 못 먹고 다 버려질 배달음식을 시키면서 2만 5천원, 3만원까지도 훌쩍 질러버리면서 나는 깨닫는다. 이십 대의 나의 늘씬한 몸의 비결은 가난과 질병이었다는 것을. 자기관리는 확실히 아니었다. 야식은커녕 낮에 식사 한 끼 먹을 때도 김밥 한 줄이나 학식으로 때웠고, 재료를 소분해서 착실하게 집에서 해 먹었다. 유난히 속이 안 좋은 날에는 몸에 좋은 부드러운 음식을 사 먹는 건 비싸니까 굶었다. 그때는 몰랐지, 이게 저속 노화 식단인지. 간헐적 단식으로 몸을 디톡스하는 것인지! 지금은 카페에 가서 먹음직스러운 까눌레나 꾸덕꾸덕한 치즈케이크가 있으면 같이 시켜서 먹지만, 그때는 풉. 그 당시에 나에게 식사란 일상을 유지할 에너지를 보충하는 수단이었고, 늘 최소 금액을 할당했다. 근데, 지금은 2만원 남짓하는 치킨 한 마리를 배달비 4,000원을 주면서 시켜 먹을 월급이 생겨버렸다. 이런. 나는 내가 자기관리를 잘하는 줄 알았는데. 나는 오늘도 닭강정 가게 5개의 후기를 비교하며 배달 버튼을 누른다.


일이 많아 자꾸만 퇴근이 10시, 11시가 되어, 집에 오면 보상 심리가 찰랑거린다. 너무 피곤해서, 옷도 갈아입지 않고 소파에 그대로 누워서 ‘도저히 못 씻겠어’를 중얼거린다. 그렇게 안 씻고 잔 날도 여럿. 그런 나를 일으키는 마법은 떡볶이 주문을 걸어 놓고, 배달 시간 28분 남았습니다, 를 확인한 후, 28분 안에 씻고, 옷도 갈아입고, 쌓여있는 빨래나 설거지를 마쳐야 한다는 미션이 생길 때다. 28분 뒤 나는 넷플릭스 예능을 하나 켜두고 떡볶이를 먹어야 하니까. 그 뒤에 뭔가 남겨두고 싶지 않다. 28분!! 27분!! 26분!! 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상을 펴고, 예능을 고른다. 떡볶이가 딱! 도착하면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나는 시답잖은 예능이나 드라마를 켜놓고 떡볶이를 먹는다. 진지한 프로그램은 사절이다. 시답잖은 것, 이 휴식의 핵심이다.


그렇게 닭강정이나 떡볶이가 도착하면 보통은 1/4도 먹지 못한다. 사실, 나는 배가 고픈 게 아니었으니까. 첫입이랑 두 번째 정도가 짜릿하게 맛있고, 그다음은 애처롭게 음식물 쓰레기로 남아버린다. 하지만…. 하지만… 이런 음식이 앞에 깔려있고, 예능 프로그램이 앞에 돌아가 줘야 쉬는 것 같단 말이다. 나는 쉬고 싶다고. 나는 보상을 받고 싶다고! 거짓 배고픔인 거 내가 모르나. 하지만, 어쩔 수 없다니까.


그리고 다음 날 후회하는 나를 만난다. 어김없이 몸이 붓고, 속이 더부룩하다. 아…. 야식 괜히 먹었어… 아… 싱크대로 가서 남은 음식을 버리거나, 냉동해도 될만한 것은 소분해서 냉동한다. 퉁퉁 부은 몸을 달래려고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로 번갈아 가면서 씻고 손을 지압하고 폼롤러를 몇 번 한다. 썩 효과는 없다. 짜릿함과 후회. 나는 요즘 이걸 자꾸만 반복한다.

동료들과 만들어먹은 라볶이

내가 야식을 먹기 시작한 건, 1년 전쯤부터이다. 이직하고 밤 10시, 11시, 심할 때는 새벽 1시, 2시, 3시, 4시까지 야근이 이어지는 때가 잦았다. 오후 6시쯤 저녁을 먹고, 새벽 2시까지 일하다 보면 그때는 정말로 배가 고팠다. “불닭볶음면 하나 끓여 먹을까?”. “하나로 누구 코에 붙이냐? 3개는 끓여야지.” “몇 개 있는데? 열어봐. 4개 있어? 그럼 그냥 다 끓여.” “치즈도 추가해 줘요.” “냉장고에 냉동만두 있는데 그것도 같이 구울까?”. 살면서 야식도 불닭볶음면도 먹어본 적이 없는 나는 모짜렐라 치즈가 올라간 불닭에 만두 하나를 올려 호로록 먹으면서ㅋ, 이 시간의 이 짜릿한 맛은 얼마나 황홀한지를 느껴버린다. 맵고 짠 걸 먹었으니까, 냉동실에 있는 벤앤제리 아이스크림도 먹어줘야 한다. 아이스크림까지 먹고 1~2시간 정도 더 일하고, 쓰러져 잠든다. (참고로, AIRBNB를 빌려 다 함께 미국 출장 중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내 야식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불닭을 끓여주고, 냉동만두를 구워주는 동료들이 없어도 나만의 야식 여정을 펼치고 있다. 맛-있-잖-아! 아침에 일어나면 일기 쓰고, 요가하고, 차를 마시고, 명상하고, 책을 읽고, 건강하고 균형 잡힌 식사를 해오던 나는 불닭에 치즈를 올려서 밤을 즐길 줄 알게 된 내가 사실 꽤 좋다. 인생의 건강함이란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나는 건강하고 반듯해서 가벼운 몸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나도 참 좋았지만, 야식을 먹으면서 낄낄거릴 수 있는 삶의 스펙트럼이 생긴 나도 좋다. 삶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행복할 수 있으니까. 나는 행복해질 방법이 하나 더 생긴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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