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은 게 틀림없어

by 어린

내가 교회를 다니던 때, 정말 싫어하던 말 몇 가지가 있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절대 굶어죽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주님께 간구하면 어찌 당신의 자녀를 버리겠냐는 그 말. 그 설교를 들을 때면 기가 찼다. 뉴스 안보나? ? 저기 먼 나라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한국에도 먹지 못해 죽는 사람이 서울역만 나가봐도 잔뜩 있었고, 영역을 세계로 넓히면 파다했다. 사실굶어죽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전쟁은 여기저기에 속절없이 폭탄을 떨어뜨렸고, 사람이 사람을 증오하고, 착취하고, 쉬이 죽였다. 저 설교는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내 생각이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그래서, 신이 이토록 무기력하기에, 언제나 내가 쉽사리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나에게 폭탄이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부모는 신을 믿고 섬기는 , 목사님이었다. 다행히 나의 부모가 죽지는 않았지만, 엄마는 사모라는 일을 하다가 깊은 우울증에 걸렸고, 암을 겪었으며, 교통사고를 겪었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장이 파열되었다. 나는 나의 부모가 죽지않음에 다행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아빠는 내가 고등기숙학교를 다니던 때 종종 전화했다. 기숙사가 4층이었고, 나는 7층복도에서 전화를 받았던 것 같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긴 복도의 두꺼운 기둥 뒤에서 아빠의 전화를 받곤 했다. 해가 지고 어둑했을 때가 많았다. 아빠는 이런 말을 하곤 했다. xx아, 엄마가 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나오질 않아. 네가 전화 좀 해봐. xx아, 엄마가 어제 새벽에 차 끌고 나가서 아직까지 들어오질 않아. 네가 전화 좀 해봐.


나는 아빠를 사랑했고, 부모의 일을 숭고하게 여겼기에, 아빠를 이해했다. 사실상 내가 해낸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지만, 나는 부모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곤 했다. 고등학교 때도, 대학생 때도, 종종 쓰러지거나 어딘가가 아파서 응급실에 실려 가던 때마다, 나는 그 장면에 놓여있던 주위 사람들에게 늘 신신당부했다. 엄마 아빠한테 연락하지 마세요. 돈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상담 선생님은 이 이야기를 듣고 나에게 고아라고 말했다. 나는 종종 엄마의 죽음을 생각했고, 괘씸하게도 기다리기도 했다. 십여 년을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이제야 입 밖으로 꺼내보는 생각. 종종 부모의 죽음을 기다렸다. 부모가 나에게 늘 벅찼다.


안타깝게도 나의 부모는 성실했고 정직했다. 나는 부모를 사랑했다. 그게 이 모든 문제의 핵심이었다. 부모가 차라리 개차반이었다면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쉬웠을 것을. 부모에게 생기는 모든 어려움을 나는 해석할 도리가 없었다. 일 년, 이 년이 지나서 십여 년이 가득 차고 넘쳤을 때쯤 나에게 남은 건 삶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늘 걱정이 가득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어느 날 속절없이 불행이 나를 뒤덮을 때 나는 그 모든 것을 맞고, 그저 무너질 것 같았다. 삶에 대한 불안은 여기저기 일상을 침투했다. 자주 가던 스타벅스에서 샌드위치와 커피가 담긴 쟁반을 가지고 2층으로 걸어 올라갈 때마다 나는 넘어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 캘린더는 항상 내가 해야 할 일과 성취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로 가득했다 - 먹고 살기 위한 준비들. 통장의 잔액을 하루에도 몇 번씩 확인했고, 잔액을 확인하다가 고개를 들면 보이는 서울의 고층빌딩, 아니 빌라들 사이에서 내가 갈 곳은 어디일지를 고민했다. 가진 것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잃어버릴까 떨었고, 무언가 좋은 것이 생기면 기쁘기보다는 그것이 얼마나 오래갈지를 생각했다. 불행은 반드시 온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반드시 온다!


지난 9월 미국 애틀랜타에 출장을 갔다. 듣던 것과 다르게 날이 흐렸다. 덥다고 듣고 왔는데 온통 먹구름이었다. 미팅을 조율하던 애틀랜타의 담당자에게 연락이 왔다. 애틀랜타에 허리케인이 왔다고. 구글에 미국 뉴스, 주(state) 뉴스를 찾아 검색했다. ‘역대급 허리케인’이라는 타이틀과 부서진 나무, 망가진 집, 사망자 x명이라는 기사가 가득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음, 이제 고요히 죽을 기회가 온 것인가! 늘 적당히 살다가 가야겠다고 생각했기에 기회인가 싶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나는 계속 ‘안전할’ 방법을 검색했다. 어떻게 이동해야 하는지,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물론, 팀 운영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팀원들에게 가이드를 주기 위함도 있었지만, 아마 나도 살고 싶은 게 아닌가 싶었다. 사실, 매번 일찍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치고는 아이폰 메모장에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을 너무 많이 적어뒀다. 네이버 지도에는 가보고 싶은 근처 음식점이 가득 저장되어 있고, 구글 지도에는 여행 가고 싶은 곳과 그 지역의 맛집들까지도 저장되어 있었다. 배우고 싶은 것은 얼마나 많은지, 첼로도, 피아노도, 도예도, 춤도 다 배우고 싶었다. 삶을 그토록 싫어한다면서 그리운 것도 가득했다. 산책하다가 커다란 나무를 보면 LA의 큼직한 나무들을 그리워했고, 날씨가 차가워지자, 프랑스의 뱅쇼가 그리웠다. 고층 빌딩 숲을 걷다 보면 우간다의 흙탕길과 뛰노는 아이들이 그리웠다. 30대가 되니 20대의 파릇함과 미숙함이 그리워졌고, IT회사에서 일을 시작하니 돈이 없어 쩔쩔매면서도 공부에 매진했던 대학원 시절이 그립기도 했다. 조개스튜를 먹으니, 사랑하는 단골집, 선리네의 조개 크림 스튜를 꼭 다시 먹고 싶었고, 시간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회사 앞 필라테스 수업을 들으러 갈 때마다 언와인드 요가원의 강렬한 수련 시간이 그리웠다. 나는 매일 틈틈이 불안했지만, 삶을 그득히 사랑했다. 아, 집착이라고 해야 할까.


조지아주를 휩쓸고 간 토네이도 헬린(Helene)이 플로리다를 강타하고 기세가 꺾인 채로 애틀랜타를 조용히 지나가고, 애틀랜타에는 햇살이 다시 차오를 때쯤, 나는 분명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기억이 난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텅 비어있던 데카두르(Decatur) 광장에 사람들이 거닐고, 광장 중앙에 우뚝 서 있던 나무의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햇빛에 반짝일 때, 나는 그 거리를 걷는 게 참 좋았다. 눈에 보이는 작은 동화책 전문 서점에 들어가서 조카에게 줄 만한 영어 동화책을 고르던 그때, 나는 세상의 다양한 이야기와, 색색의 책들과 한국에서 쑥쑥 자라고 있는 조카를 생각하며 분명 기뻤다.


신이 나에게 내가 결코 답할 수 없는 인생의 의문을 던져주면서 같이 한 가지를 더 준 게 분명하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에 온통 기뻐하는 마음. 가을의 노오란 은행나무 잎에 신이 나고, 도보에 가득 떨어진 바스락거리는 나뭇잎을 밟고 점프하며 발에 닿는 그 순간의 촉감과 바사삭 소리를 알아차릴 수 있는. 바람이 차가워질 때, 살갗을 스치는 바람에 계절이 변함을 감지하며 반가워하는 마음을. 은행나무 잎이 떨어지면, 그 나뭇잎들을 떨어뜨리며 고고히 드러나는 앙상한 나뭇가지를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마음을.


아마 나는, 앞으로도 계속 죽고 싶은 척하면서 제일 신나고 재미있게 살 것 같다. 친구와 늘 이야기 하듯, 골골거리는 할머니가 되어서 멸치국수 집에 가서 오천 원짜리 멸치국수를 한 그릇 사서 나눠 먹으며, 오늘은 내가 살게, 낄낄, 하는 삶을 살겠지. 그때쯤이면 멸치국수가 팔천 원쯤 되었을지 모르겠다.



토네이도가 지난 후, 애틀랜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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