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재구성 2

by 산비



<관계의 재구성> 제4장 형제, ‘비슷한 시간대를 살아가는 또 다른 나’ 제5장 젊은이의 초상,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시나요?’를 읽었습니다.

어제 영화 <라디오 스타>를 보면서도 ‘관계’에 대한 생각들을 많이 했습니다. 최곤과 그의 매니저 박민수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까요? 물론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들의 인간적인 끈끈함, 유대감, 의리, 순수성에 감동받고 눈물을 흘리기는 했지만, 그들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정상적인 인간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무언가 결핍되어 있고 뒤틀려 있는 인간들이지요.

최곤은 정말 덜 된 인간이고, 박민수에게도 무조건 박수쳐줄 수만은 없습니다. 인간적이기는 하지만 비현실적이고 비열하고 비굴한 모습이지요. 그렇다고 마냥 욕할 수만도 없는 것은, 우리도 우리 안에 그런 모습들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책으로 돌아와서. 하지현 님은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과 <태극기 휘날리며>를 통해 장남과 차남이 갖는 성격상의 특성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형제간에 벌어지는 보이지 않는 질투와 경쟁에 대해 말합니다. 저도 장남인지라, 장남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책임감이나 속성에 대해서 무척 공감하며 책을 읽었습니다.

“맏자식은 괴롭다. 그들은 누구나 한 번쯤 꿈꾸어보는 욕망에 자유롭게 몸과 마음을 내맡기지 못한다. 내가 원하는 삶, 위험과 모험으로 가득 찬 삶, 백지 위에 온전히 내 그림을 그리는 삶보다는 부모가 그려놓은 밑그림을 색칠하거나 주변의 덧그림을 그리는 안정적인 삶에 안주한다.”


예전에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란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도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장남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짊어져야만 하는 업보가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헤치고 극복해갈 것인지는 저마다의 몫이겠지만 어쨌든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차남도 마찬가지지요. 차남이기 때문에 겪어야만 하는 운명적 업보가 있게 마련입니다.


“친밀감이란 서로의 관계를 아주 가까운 거리로 당겨놓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과 한 사람 사이에 최적의 거리를 산출하는 것, 그리고 그걸 유지할 줄 아는 것, 그 안에서 만족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성숙한 독립된 개체 사이의 친밀함의 요체다.”


우리 사이의 최적의 거리는 얼마일까요?
어느 선 안에서 우리는 만족할 수 있을까요? 아니 만족해야만 할까요?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현 님은 한 덩어리처럼 느끼는 공생적 친밀감은 유아기적인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바라고 원하는 것이 많아지면 결코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욕망은 고뇌와 번민을 낳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욕망을 내려놓아야 니다.

2006 11.27 비 오는 늦가을 밤에 산비



“삶은 설명이 불가능한 부조리극이고,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가족이라는 가면의 힘을 빌림으로써 욕망과 현실로 찢긴 내면을 가까스로 추스르는 애처로운 연기뿐인지도 모른다.”


칼 융은 사람들이 세상에 비치는 겉모습을 가면을 의미하는 ‘페르소나’라고 불렀습니다. 사회적인 자아에 매몰되거나 본질적인 자아와 동떨어진 삶에 맞춰 사느라고 헉헉거릴 때 지나치게 페르소나에 얽매여 있다는 표현을 씁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가면 ‘페르소나’를 쓰고 연기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뛰어난 배우나 작가는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자유자재로 벗었다 쓰면서 활용하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자아의 유연성이 탁월한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오히려 세상을 편하게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페르소나에 얽매여 삶에 헉헉거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현 님은 누구를 만나고 어떤 사람을 대하느냐에 따라 필요한 역할에 맞추어 원하는 가면을 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미치지 않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래야 할까요?


어떤 것이 더 바람직한 삶인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집에서, 사회에서 각각 다른 가면을 쓰고 거기에 맞는 연기를 하며 가까스로 내 역할을 해내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 단 하나의 가면만을 쓴 채 나의 정체성을 지켜내며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도 진실하게 사는 삶인지 확실치가 않습니다.

삶은 변화이고, 정체성을 지키는 것도 변화하는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배운 것 같은데 그렇다면 끊임없이 변화하며 다른 연기를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아침부터 너무 무거운 주제를 다룬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2006 11.28 산비



너무 자학하지 마세요. 벽을 느껴봄으로써 벽을 넘고 싶은 욕망과 벽을 뛰어넘을 에너지를 동시에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벽이 프로네 님이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한 지렛대가 되어 줄 것이라 확신합니다. 지금 단계에서 벽은 프로네 님에게 좋은 약입니다. 만약 벽을 느껴보지 못했다면 언제까지나 우물 안 개구리로 만족하고 지냈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알고자 노력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라톤 하프를 뛰어내면 풀코스가 뛰고 싶어 지고, 풀코스를 정복하면 울트라 코스가 유혹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점을 향해 끝없이 도전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한 개인의 발전을 이끌고, 나아가 이 우주와 세계의 발전을 만들어냅니다.

6장 친구, ‘왜 내겐 진정한 친구가 없지?’와 7장 결혼, ‘결혼이란 미친 짓? 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을 읽은 것으로 하지현 님의 <관계의 재구성> 읽기를 끝마쳤습니다.

영화 <친구>에 나오는 4명의 친구를 통해 친구란 어떤 관계이고, 어떠해야 하는지. 우정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풀어나갑니다. 하지현 님은 친구란 내 자아의 보조역할을 해주고, 내가 뭔가 다른 길로 갈 때 지적해줄 등대 역할을 해주고, 내가 가고 싶었던 길을 대신 가주는 대체적 자아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친구는 서로의 차이와 다름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하고, 떨어져 있더라도 항상 그 존재를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어야 하고, 내가 원할 때 또 그가 원할 때 딱 그만큼의 자리에서 있어주는 것을 견딜 수 있어야 하는 사이여야 한다고 말해줍니다.

결혼에 대한 하지현 님의 글도 많은 부분 공감이 갑니다.


“부부란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이식거부라는 파국을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면역억제제를 투여해야 하는 관계이다./ 같은 말을 하지만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이 다르다./ 결혼 이후의 삶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좌절의 과정이다./ 부부관계란 하나가 되고픈 욕망과 내 자존심과 정체성을 오롯이 지키고픈 본능 사이의 진자운동의 연속이다./ 하나가 되어 모든 것이 통하는 관계는 현실적인 부부관계에서는 실현될 수 없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각자의 삶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지켜야 할 룰을 만들고 충실히 지키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다.”

내일부터는 앨빈 토플러의 <부의 미래>를 집중적으로 읽어볼까 합니다. 그럼.


2006 11.28 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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