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집전>은 43쪽까지 우선 읽었습니다. 시의 해설 첫마디에 ‘興이다’ ‘賦이다’ 하는 것들이 무엇을 말함인지 궁금합니다. 가르쳐 주십시오. 시구 위에 찍힌 검은 점과 흰점에 대해서도.
그리고 <티벳 사자의 서>를 조금 읽었습니다. <바가바드기타>에서 공부한 용어와 개념들이 다시 나오고 있어 흐뭇한 마음이 듭니다. 책을 읽어나가는데도 도움이 됩니다. 편집자 ‘에반스 웬츠’의 해설 ‘비밀의 책을 열다’ 편을 읽으며 문득 ‘다빈치 코드’가 연상되었습니다.
댄 브라운이 늘어놓던 이교도의 많은 상징 기호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기독교에 스며들어와 있는지에 대한 소설 속 설명들이 이 책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댄 브라운이 이 책을 읽고 소설의 모티브를 얻지 않았나 싶을 정도입니다.
미국 화폐에 그려진 삼각형, 신성한 물고기 상징, 성체를 담는 그릇에 새겨진 태양상, 십자가, 성당 건축에 사용된 상징물들, 교황의 법복의 색상과 디자인 등은 한때 이교도들이 사용했던 상징 기호들이 현대 기독교에 그대로 살아남아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들이라고 합니다. 소설 <다빈치 코드>가 왜 그렇게 사람들에게 강렬하게 어필하였는지 알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편집자 에반스는 또 고대 동양의 많은 상징 기호들이 서양의 문학 작품 속으로 흘러들어 갔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솝 우화>가 인도의 산스크리트 설화집 <판차탄트라>와 <히토파데샤>의 영향을 받았다든지, 중세의 종교극들이 지금도 티벳 인접 지역의 불교국가에서 행해지고 있는 신비 연극의 상징성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증거로 들고 있습니다.
49라는 숫자가 갖는 의미와 5 원소(五禪定佛 - 색온, 행온, 상온, 식온, 수온)에 대한 상징적 의미들을 공부했습니다. 이것은 다섯 가지의 지혜(五聖智)와도 연결됩니다. 우리는 지금 흙 원소로 대변되는 제4순환기에 속해 있는데, 제5순환기에 이르면 어둠 속에 묻혀있는 잠재의식이 인류의 활동적인 의식으로 자리 잡게 되어 과거의 모든 경험을 기억할 수 있게 되고, 진정한 앎을 얻어 윤회계의 삶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원소들로부터 해방될 것이라는 설명이 재미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라도 진화 과정에서 벗어나 즉각적으로 영원한 자유를 얻고자 하는 것이 모든 명상 학파들이 추구하는 목표라고 합니다. 우리도 열심히 도를 닦아 실체가 없는 이 마야의 세계(윤회계)에서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들도록 노력합시다. 오늘은 여기까지 입니다.
2007 1.11 산비
요즘 <중천>이라는 영화를 하고 있는데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티벳 사자의 서>의 세계와 연관성이 있어 관심이 갑니다. 오늘은 153쪽까지 읽었습니다. 편집자는 책 내용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다소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될 소지가 있음을 주지시키고 계속해서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할 것을 강조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려는 경향들의 집합을 우리는 흔히 ‘성격’이라고 부르는데.../ 인간의 도덕적 본질이며 지적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성격’이 하나의 육체로부터 다른 육체로 넘겨지는 것이 분명하며, 세대에서 세대로 윤회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도중에 다른 성격이 합쳐져서 달라진 성격은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새로운 몸으로 환생할 때 그대로 전해진다. 이렇게 정의되는 성격을 ‘카르마’라고 부른다.”
우리가 gene이라고 부르는 염색체의 염기를 통해 우리의 혈통과 성격이 대대로 전해지는 것을 윤회설과 결부시킬 수 있을까요? 한 번 깊게 생각해봐야 할 숙제입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2007 1.15 산비
<티벳 사자의 서> 오늘은 153쪽부터 185쪽까지 읽었습니다.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의 해설이 주된 내용입니다. 편집자 에반스의 해설을 읽으면서는 뜬 구름 잡는 것처럼 허황되던 이야기들이 융의 해설을 통해서 상당한 설득력과 흥미를 갖게 됩니다. 의자를 바짝 당겨 앉고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었습니다. 이유는 그가 우리들의 심리를 꿰뚫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이 일반적으로 어떤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어떤 생각을 미리 하면서 책을 읽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배려를 충분히 하면서 글을 써나갑니다. 때문에 독자들이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는 심리적 저항을 자연스럽게 내려놓게 됩니다.
속 좁은 현대인들은 분명한 것을 좋아합니다. 모호하고 관념적인 것들을 터부시 합니다. 신들이 생각의 투영물이라는 것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합니다. ‘영혼 soul’이란 실로 하찮고, 무가치하고, 주관적인 단어로 여겨, 대신 ‘정신 mind’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단지 주장하고 , 설명하고, 방어하고, 비평하고, 논쟁할 뿐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그 ‘마음’ 자체에 대해서는 토론의 대상에서 제외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융은 이 책을 열린 눈으로 읽고 편견 없이 자신들의 마음에 새기는 사람들에게만 큰 공부가 될 것이라고 전제합니다.
“인간의 영혼 속에는 신이 내재해 있다. 그 신은 바로 창조의 힘이다. 이 힘을 통해서 영혼은 생각들을 창조한다. 그리고 그 생각들에 의해서 영혼들은 서로 차이를 갖게 된다. 결국 생각은 모든 존재를 결정하는 조건일 뿐 아니라 동시에 그 존재 자체이기도 하다.”
“그대 자신의 마음이 곧 참된 의식이며 완전한 선을 지닌 붓다이다. 그것은 텅 빈 것이지만 아무것도 없는 텅 빔이 아니라 아무런 걸림이 없고, 스스로 빛나며,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한 텅 빔이다.”
<티벳 사자의 서>는 가르쳐줍니다. 신들조차도 우리들 자신의 영혼에서 비치는 빛이고 우리들 영혼에서 투영된 모습이라고. 그 영혼(다시 말해 인간의 마음)이 모든 것의 근원 자리임을. 우리는 항상 우리를 밀쳐내고 억누르는 수많은 것들에 둘러싸여 있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이 모든 것들이 과연 어디로부터 왔는지, 누구에 의해서 ‘주어진’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 ‘주어진’ 것들의 세계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 그것이 죽은 자가 대자유(우나 살루스)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 책의 목적하는 바입니다. <티벳 사자의 서>는 모든 ‘주어진’ 것들의 ‘주는 자’가 바로 우리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창조해 낸 장본인이고, 모든 결정을 내린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인간은 죽어서도 지상의 삶을 계속하고 있다고 믿으며 자신이 육신을 떠난 영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나’를 고집하고 ‘나’를 초월하지 못합니다. 죽은 자는 나의 우월성을 과감히 포기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생각과 이성과 도덕에 의해 지배되는 모든 삶이 막을 내리는 것이며 카르마의 환영에 자진해서 항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 세계의 입문식에서 치르는 죽음 의식과 일맥상통합니다.
나를 내려놓고 사고와 관점의 대전환을 이루는 상징적인 죽음을 거쳐 초월 세계로 들어가는 것, 그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거듭남)과도 같습니다. 구원은 과거의 무의식과 무지의 상태로부터 벗어나 깨달음과 자유의 상태로 인도되는 것이며, ‘주어진’ 모든 것으로부터 초월하고 승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 걸쳐 근본적으로 비슷한 상상력을 갖고 있는데 이것을 융은 ‘원형(archetype)’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성 이전의 인간의 영혼에 속한 기관과도 같은 것이며 영원히 유전되는 하나의 틀과 같다는 것입니다. 인류 전체에 하나의 공통된 정신의 틀이 존재하며 그 틀이 인간의 모든 경험에 형태와 방향을 결정하며 그 틀은 유전한다는 것. 재미있는 가설입니다.
우리가 죽은 자를 위해 제사를 지내고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것은 실은 산 자의 심리적인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라는 지적이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는 사후의 세계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든다는 것입니다.
<티벳 사자의 서>에는 사후세계에 대한 선명한 그림과 사자를 위해 행해지는 가장 차원 높은 정신적 노력이 담겨 있습니다. 사후 영적 체험의 클라이맥스는 생이 끝나는 바로 그 순간에 찾아온다고 합니다.
인간의 삶은 가장 높은 차원의 완성을 위한 하나의 수레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상의 삶에 대해 최선을 다하고 힘들게 노력하여 비로소 얻어지는 최후의 열매가 우리를 새로운 육체의 삶(윤회)으로 이끕니다. 가장 궁극적으로 사자로 하여금 어떤 대상에도 집착하지 않고, 텅 빈 충만(空)의 영원한 빛 속에 살며, 생과 사의 온갖 환영으로부터 벗어나 윤회의 수레바퀴의 중심축에서 휴식할 수 있게 하는 것, 이러한 위대한 카르마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진실된 삶입니다.
결국 또다시 되풀이 되는 결론은 ‘지금 현재에 충실한 삶’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 현세의 ‘위대한 카르마’를 이루기 위해 서로 격려하며 노력합시다. 퇴근합니다.
2007 1.16 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