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루브르전 첫 번째 소주제 <신성한 숲>을 공부했습니다.
이 장에서는 풍경화가 종종 초자연적인 현상, 즉 신의 출현이나 신비로운 발현들을 표현하는 방편이었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풍경화가 완전한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기 이전에는 신화나 종교화의 뒤 배경을 장식하는 정도로 국한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내용 중에 신화와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서구 유럽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이 두 가지는 필수적 요소 인 듯합니다.
원시 이교도적 신화들이 기독교 세상이 도래하면서 그 속에 흡수되어 버렸다는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우리가 <티벳 사자의 서>의 도입부를 읽으며 접했던 내용 아닙니까? 실제 칼 구스타프 융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융 이후 고대 이전의 원시사회, 즉 문화의 근원이 되는 인간 집단에서 만들어진 원형 그대로의 신화의 가치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놓은 것이 ‘프시케 신화’입니다. 그리스어로 ‘프시케’는 영혼과 나비를 동시에 뜻합니다. 프시케는 뛰어난 아름다움과 호기심으로 비너스의 노여움을 사 여러 차례 위기를 겪지만 용기와 의연함을 발휘하여 비너스가 준 시련을 모두 통과하고 에로스와 행복한 결혼을 합니다. 신을 향해 방황하는 영혼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프시케 신화는 이교도적인 은유와 기독교적인 사상이 완벽한 결합을 이루고 있어 지금껏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다는군요.
<루브르박물관전>은 하루에 한 주제씩만 공부해나가려고 합니다. 나머지 시간에는 라마 아나가리카 고빈다의 <티벳 사자의 서> 해설문, ‘죽음의 과학이 발견한 삶의 비밀’을 읽었습니다.
“우리가 태어남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죽음의 반대편에 불과하다. 그것은 방안에서는 출구라 부르고 바깥에서는 입구라고 부르는 방문과 같다.”
고빈다는 <티벳 사자의 서>가 생의 마지막이 다가옴을 아는 사람들이나 죽음이 임박한 사람들뿐 아니라, 아직도 남은 생이 많은 사람들과 처음으로 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으려는 사람들이 읽어야 할 책임을 강조합니다. 단순히 민담에 근거한 가설적인 사후세계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이르는 열쇠이며, 신비 세계의 입문자들을 위한 안내서이고, 영적 자유의 길을 추구하는 이들의 길잡이라는 것이지요.
진리의 길에 들어선 입문자는 새로운 영적 삶에 들어가기 전에 상징적으로 자신의 과거와 자신의 낡은 에고를 죽여야만 하며 듣고, 사색하고, 명상하는 세 가지 단계의 수행을 통해 살아있을 때 사후의 존재 상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능력들을 터득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첫 번째 단계, 듣기는 마음을 다해 듣는 것, 신실한 믿음을 갖고 듣는 것을 뜻합니다. 두 번째 단계 사색은 이런 직관적인 태도가 이성을 통한 이해로 변화하는 과정이고, 세 번째 단계는 직관적 감성과 지적 이해가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 살아있는 실체로 탈바꿈하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해야 지적인 확신이 영적인 확실성으로 성장하며, 아는 자(能知)와 앎의 대상(所知)이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 단계를 모든 공부에 일반화시켜 적용하면 좋을 듯합니다.
이 가르침을 통해 입문자는 비로소 죽음의 세계를 지배하게 되고, 죽음이 하나의 환영임을 이해하며,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합니다. 정말 우리가 마음을 열고 진력을 다해 이 <바르도 퇴돌>을 공부한다면 삶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될까요? 왠지 오히려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오늘 하루 어떠셨는지요? 치열하게 공부하셨는지요? 게으름 피우지 말고 공부에 매진하시기 바랍니다.
2007 1.18 공부를 재촉하는 산비
오늘은 <티벳 사자의 서>의 또 다른 해설문 ‘환생과 윤회의 비밀’을 읽었습니다. 이 글을 쓴 ‘존 우드로프’는 몇 가지 아주 기본적인 질문들을 던지면서 논지를 펴 나갑니다. <티벳 사자의 서>에서 묘사하고 있는 실체적인 사후세계에 대해서 비교적 알기 쉽게 설명을 해줍니다.
‘어떻게 하면 죽음을 피할 수 있을까?’ ‘인간이 병이나 사고 말고 순수하게 늙어서 죽는 죽음이 있을까?’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여기에 대한 해답을 담고 있는 <티벳 사자의 서>는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 <티벳 사자의 서>는 ‘죽음의 기술’에 대한 작품이다. 둘째 이 책은 인간 영혼을 정화하고 가르치고 위로하고 강한 정신력을 갖게 하는 인간의 마지막 순간을 위한 영적 치료 교과서이다. 세 번째 특징은 바르도에 있는 동안에 사자가 겪게 되는 체험을 묘사하고 가르친다. 즉, 저승으로 여행길을 떠나는 자의 지도책과 같은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투명하고 환한 빛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티벳 사자의 서>는 이 빛을 공의 세계에서 비쳐 나오는 무한히 파동 치는 투명한 빛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빛을 인식하고 대자유에 이르도록 <티벳 사자의 서>는 계속해서 일깨웁니다. 그것에 실패하면 두 번째 약간 흐려진 상태의 빛이 나타나는데 만일 사자의 의식체가 이 빛마저 인식하지 못하면 그때에 사후세계의 첫 번째 중간 상태인 치카이 바르도가 시작됩니다. 이어서 초에니 바르도에 이르면 사자의 의식체는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이 회복됩니다. 이 순간부터 사자의 심령적인 사후 삶이 시작됩니다. 사자는 처음에 자신이 죽었음에도 여전히 세상 속에 있다고 믿게 되며, 환영들을 실제 체험이라고 믿습니다. 그다음 단계에서 비로소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여전히 실질적인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우리가 꿈속에서 보는 것처럼 거울에 비치지도 않고 그림자도 안 생기는 그런 몸이지만...
재미있는 것은 사고로 다리가 절단된 사람이 오랜 기간이 지나서도 발바닥이 가렵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자도 죽음 뒤에도 실제적인 육체를 갖고 있다고 상상하며 그 상상의 몸을 가지고 다르마카야(법신), 삼보가카야(보신), 니르마나카야(화신)을 경험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뒷부분에 몇 가지 논란과 의문점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나중에 차분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어제 수행의 세 단계에 대해서 말씀드렸지요. 듣고, 사색하고, 명상하기. 다시 말해 읽고, 생각하고, 체험하기. 모든 공부의 기본입니다. 그래야만 직관적인 감성이 지적 이해가 되고 이것이 실체화되면서 궁극적으로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앞으로 어떤 식으로 공부를 해나가야 하는지를 밝혀주는 기본 진리입니다. 사실 가만히 돌아보면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여기까지 와 있습니다.
제가 ‘방외지사’라는 책을 소개하자, 프로네 님은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와 ‘사찰 기행’을 제시하여 앎과 생각의 범위를 확장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의기투합하여 책의 현장 ‘죽설헌’을 찾아 나섰지요. 그곳을 돌아보며, 책에 나온 주인공을 직접 만나며, 우리는 우리의 지식을 영적 감흥으로 승화시키는 체험적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권해준 ‘스콧 니어링 자서전’은 자연주의와 조화로운 삶에 대한 각성을 일으키며 저를 헬렌 니어링과 장길연 부부 그리고 <월든>의 헨리 데이빗 소로우에게까지 인도하는 다리가 되어 주었습니다. 제가 전해준 <영영 이별 영이별>을 읽고 김별아의 유려한 필체에 매혹된 당신은 <미실>과 윤석화의 연극을 통해 관심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연금술사>로 시작된 ‘파울로 코엘료 알아가기’ 릴레이를 통해 우주와 자아의 신화에 매료된 우리는 결국 ‘산티아고 가는 길’을 반드시 걷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하기에 이르렀지요.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예를 더 들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지금 현재 당신과 나를 이끌고 있는 힘은 <나비와 전사>로부터 발원합니다. 저는 처음 ‘고전평론가’를 자처하는 고미숙 님에 주목했을 뿐인데, 당신은 범위를 더욱 확장시켜 연암 박지원의 세계와 ‘수유 너머’ 연구실을 통해 지식공동체로서의 코뮌에 깊이 빠져 들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신세계에 당신은 경악했고 즐거워했습니다. 비록 역량 부족에 헐떡거리며 좌절을 맛보기도 했지만, 살아있는 체험으로서의 공부를 해나가시는 프로네 님의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책을 읽었고 많은 것을 들었으며, 많은 생각들을 나누었고 많은 곳을 찾아다니며 체험하였습니다. 내가 닦은 길을 당신은 확장했으며, 당신은 다시 새로운 길로 나를 이끌었습니다. 당신을 만나게 해 준 신에게 무한히 감사드립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2007 1.19 당신의 도반 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