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매혹시키는 철학적인 풍경

by 산비

“그림을 감상하는 데서 너무 관념적인 태도는 금물인 줄 알지만 동양의 산수화란 항상 작가 자신을 그 풍경 속에 집어넣고 그 속에서 거닐면서 그려지는 것인 까닭에 멀리서 바라보는 경치로서 그려지는 서양 풍경화의 감상법과는 그 처지가 매우 다름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최순우


“그림은 내 눈 깊은 곳에서부터 그려진다. 그림은 분명 내 눈 속에 있다. 하지만 나는 그림 속에 있다.” - 라캉


오늘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완독 하였고, 루브르전 도록 3장 ‘고전주의적 이상’과 4장 ‘환상과 숭고미’ 편을 공부하였습니다. 최순우 님은 서양화와 동양화의 감상법이 매우 다름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자연을 바라보는 인식 주체로서의 화가의 관점이 상이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자연이 내비치는 숭고하고 무시무시한 미/ 자연의 난폭한 아름다움/ 거대하고, 야만적이며, 야생적인 어떤 것/ 끔찍하고 비장한 숭고미/ 장엄하고도 으스스한 풍경...” 이런 것들이 18세기 서양화가들에 의해서 표현된 그림의 주제들입니다.

반면, “맑고 조촐한/ 성글고 야취가 있고 담박하게 이루어진/ 너그러운 맛과 은근하게 가락 잡힌/ 무심의 아름다움/ 잔재주의 공이 아니라 탁 트인 심안이 불가결한 표현에만 진실과 순정을 기울인/ 고요와 사색에 사무친 아득하고도 깊은 빛깔/ 고요한 아름다움과 호사스러움이 해화 되어 은은하게 가슴을 두드려주는...” 것들이 바로 우리의 ‘한국적 미’입니다.


최순우 님의 글을 읽다 보면 ‘데포르메’란 말이 자주 나옵니다. 데포르메(Deformer Deformation)란 현실의 사물을 있는 상태 그대로 묘사하지 않고, 왜곡하거나 형태를 바꾸거나 일부를 과장하여 표현하는 것을 말하는데, 객관적으로 사물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내면에 비친 형상이나 또는 예술가의 내면에 깃든 매개로서 묘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데포르메적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사물의 측면이 보이게 되는 점이 최순우 님이 발견한 한국의 미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이것을 ‘고요한 익살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합니다. 단원 김홍도의 풍속도에 묘사되는 인물들의 구수한 얼굴들과 익살스러운 표정과 동작 속에서 느껴지는 해학의 아름다움 속에 오히려 지체할 수 없는 일말의 엷은 애수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스스로 마음이 조용해지거나 또는 홀로 실소를 자아내게 해주는 내재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전에도 우리가 이야기 나눈 적이 있지만, 아름다운 것들의 대부분은 자연으로부터 옵니다. 자연이 빚어내는 풍경은 사랑스러우며 또한 그림이 될 만큼 아름답습니다. 이것을 피토레스크(pittoresque)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연에 매혹되면 우리는 그 웅장한 아름다움에 영혼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인간의 눈을 매혹시키는 ‘피토레스크’한 풍경으로부터 이윽고 영혼을 매혹시키는 철학적인 풍경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산에 올라 눈앞에 펼쳐진 풍광을 바라보며 갖게 되는 마음의 요동침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먼저 눈이 매혹되고, 이윽고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감동시켜 마침내 자연은 철학적 영감을 우리에게 불어넣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산에 오르고 바다에 가게 되는 가 봅니다.


우리가 무심히 보아 넘기는 폐허에 대한 서양화가들의 감흥과 묘사가 흥미롭습니다.

“폐허는 영혼이 사는 장소인 동시에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가장 강한 상상력을 전달하는 요소이다. / 폐허의 모티프에서 과거의 소리를 듣고 상상의 나래를 편다. / 재창조된 폐허의 복잡한 미궁 속에서 지나간 문명의 기억이 메아리쳐 울린다. / 폐허는 죽음을 넘어선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은유.../모든 것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사소하며, 모든 것이 지나간다. 남는 것은 오직 세상뿐이고 지속되는 것은 오직 시간뿐이다.”

16-17세기의 화가들은 폐허를 바라보며 은은한 슬픔과 서정적 감동, 장엄한 숭고미를 그림 속에 담아냈다고 합니다. 우리가 역사의 유물들을 바라보며 갖게 되는 시간성, 영원성에 대한 단상들도 이와 유사합니다. 메아리쳐 울리는 문명의 기억을 회상하며 상상의 나래를 펴는...


오늘 산비가 들려드리는 책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제가 느끼는 감동과 짧은 생각들을 님에게 전하는 이 시간이 참으로 행복합니다. 편안한 저녁 되십시오.


2007 1.23 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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