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번잡하게 시작하지 말고, 아침부터 험한 소식에 휘말리지 말고,
맑고 기쁜 마음으로 차분하게 시작하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매일 잠이 들었다가 깨어남은 어쩌면 매일 죽고, 매일 다시 태어나는 윤회의 삶을 상징적으로 이어가는 것이라는... 전날 우리가 쌓았던 업의 형질이 다음날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를 명랑하게 지내며 보람찬 일들로 가득했던 날은 뿌듯하고 행복한 의식 상태로 죽음(잠)을 맞이할 것이며 다음 날 상쾌한 기분으로 다시 태어나는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반대로 서럽고 슬픈 일들로 점철된 하루를 보내거나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하루를 의미 없이 보내고 맞는 밤은 다음날 찌뿌듯하고 머리가 깨질 듯한 아픔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의 삶을 허투루 보내서는 안 되겠습니다. 치열하고도 조화롭게 하루를 경영하여 좋은 카르마를 창조해야만 합니다. 그러한 업이 쌓이고 쌓이면 우리에게 언젠가 닥쳐 올 진정한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후회 없이 행복하고 명료한 의식 상태로 사후세계의 문을 들어설 수 있을 테지요. 매일 아침 눈을 뜨며 나는 다시 태어나는 기쁨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당신과 지금 이 순간 이 우주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행복한지요.
“잠을 충분히 자고 일찍 일어날 것, 햇빛을 충분히 받을 것,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더 많이 먹을 것, 사려 깊은 이성 친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 한가로이 산책하며 속 깊은 대화를 나눌 만한 동성친구를 가질 것, 좋아하는 책, 음악, 미술관, 박물관, 전시를 볼 것.”
장석주 시인이 말하는 ‘외로움을 즐기는 법’입니다. 외로운 사람은 그 외로움이란 속성을 통해 더 강하고 독립적인 인격을 갖출 수도 있고 혹은 융통성 없고 이기적인, 한마디로 성질 더러운 인간이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외로운 것은 생각보다 나쁜 것이 아니라네요. 외로움은 이러저러한 관계에서 쌓인 피로를 푸는 휴식이며 감정의 찌꺼기들을 씻어내는 정화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심심함, 외로움, 고독함, 정적, 말없음을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외롭다고 징징거릴 것이 아니라 외로움을 극복하고 즐깁시다. 사려 깊은 이성 친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 하니, 우리 좋은 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합시다. 그러면 외롭지 않게 이 겨울을, 이 삶을 견뎌낼 수 있겠지요.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십시오.
2007 1.24 당신의 좋은 친구 산비로부터
미국의 전설적인 아이스하키 선수‘웨인 그레츠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아이스하키 퍽이 어디에 있었는지가 아니라, 어디로 갈 것인지를 생각하고 경기한다.”
퍽을 어디로 보내야 좋을지, 어디로 날려야 골이 될지를 생각하는 것.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집착하기보다는 앞으로 어떤 비전을 가지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새해가 시작된 지도 벌써 25일이 흘렀네요. 2007년도를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떻게 멋있게 장식할 것인지 다시 한번 거시적으로 점검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오늘은 루브르 도록 5장 ‘화가들의 이탈리아’와 6장 ‘사냥과 전쟁’을 공부하였습니다. 내일 마저 읽으면 끝낼 수 있겠습니다. 시경 몇 쪽도 더불어 읽었습니다. 그런데 통 재미가 없습니다. 모르는 한자가 너무 많고 시의 내용도 큰 감흥을 주지는 못합니다. <시경>의 진가를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마음의 근심함이 빨지 않은 옷을 입은 듯하다.’는 표현은 웃음이 나게 하더군요.
‘<티벳 사자의 서>의 이해를 위한 몇 개의 설명’도 함께 읽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집중력이 자꾸 떨어집니다. 요가, 탄트라, 프라나, 나디, 차크라, 만다라, 샥티, 샥타, 얍, 윰, 만트라, 싯디...
다만, 니르바나(묵티)에 대한 몇 가지 설명들은 인상적입니다.
“윤회계(현상계)의 노예 상태로부터의 해방 / 무지가 사라지면 잘못된 관념이 일어나지 않고 이전의 객관 세계도 종말을 고한다. 그 세계들이 힘을 잃으면 한계를 가진 거짓된 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니르바나라고 하며.../ 무지가 사라지면 마음은 더 이상 ‘나’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 마음이 끌려 다니지 않으므로 주위 세상을 특별한 것으로 여기는 마음조차 사라진다. 이런 식으로 마음의 먼지가 걷히고 정신적 장애들이 모두 사라졌을 때 우리는 니르바나에 이르렀다고...”
결국은 마야와 무지를 벗고, 이 세상의 모든 현상들이 다만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이며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게 되면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방법들을 수행할 수 있게 되고, 진리(다르마)에 일치하는 행위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어떤 것도 특별히 여기지 않으며 집착하지도 않는 행위 없는 행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2007 1.25 산비
“거대한 통나무를 백 사람으로도 옮길 수 없지만 물 위에 띄우면 어디든지 가고자 하는 곳에 순식간에 옮길 수 있는 것과 같다.”
<티벳 사자의 서>를 완독 하였습니다. 감개무량합니다. 하나의 과업을 완수한 듯 뿌듯한 충만감이 밀려옵니다. 그것이 경전 읽기가 주는 매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죽은 자의 길을 안내하는 이 가르침은 마치 강물과 같습니다. 통나무를 육로를 통해 옮기려 하면 엄청남 힘이 듭니다. 목적하는 곳으로 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일단 물에 띄우기만 하면 가고자 하는 곳에 쉽게 갈 수가 있습니다. 죽은 자를 어떻게든지 이끌어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강물에 뛰어들도록 안내하는 가르침이 바로 이 <티벳 사자의 서>입니다.
<티벳 사자의 서>는 인내심을 가지고 사자를 인도합니다. 각 단계, 단계에서 무지의 어둠에 가려 깨달음을 얻지 못한 자들을 격려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게 합니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친절하게 안내합니다. 그리하면 틀림없이 대자유에 이를 것이라는 확신을 계속해서 심어줍니다. 이것은 진정 ‘사후세계에서 듣는 것만으로 대자유에 이르는 가르침’입니다.
“구도자의 삶에 게으름이란 없는 것.
진지하게 듣고 사색하고 명상하며
마음이 흩어짐 없이 존재의 근원으로 들어가
마음과 현상의 진정한 본질을 깨닫게 되기를.
그리하여 존재의 근원과 하나가 되기를.”
뒤에 부록으로 실린 ‘여섯 바르도의 서시’ 중 일부입니다. 두고두고 가슴에 새기면서 삶을 살아나가면 이승에서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2007 2.2 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