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북소리

by 산비



“그리움은 사랑의 원천이며, 삶의 이상이며, 가장 인간적인 감정이다. 사랑은 그리움이고, 그리움은 사랑이다.” - 김옥림


비가 내립니다. 비가 언제 오고 오는 거지요?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보는 비의 향연입니다. 비 오는 풍경이 보기 좋습니다. 비 내리는 소리도 듣기 좋고요. 겨울에 내리면 겨울비여야 할 텐데 기분과 느낌은 봄비의 그것입니다. 사람이 너무 감상적이기만 해서는 안 되겠지만 때로는 울적해하고 외로움도 타면서 감상적인 기분에 빠져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독서에 대해서 갑자기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책을 읽기는 읽었는데, 도대체 무엇을 읽었는지, 메시지가 무엇인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덮은 책들이 여러 권입니다. 지난번 <다빈치 코드>를 다시 읽으면서도 무척 놀랐습니다. 전혀 보지 못했던 새로운 내용이 적혀있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분명 읽기는 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보는 것 같고 도대체 이런 내용이 있었던가 싶은 것은 어인 연유인지...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을 보며 그 내용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설득력 있게 이야기해줄 수 있는 책이 몇 권이나 되는지 따져보았습니다. 부끄러울 뿐입니다. 책을 몇 권이나 읽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정독해서 책에 담긴 메시지를 파악하고 그것을 되새겨 내 것으로 만들어야 비로소 나의 인식의 지평이 확장되었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책에 대한 느낌과 얻은 생각을 글로 적어서 남기는 작업이 필요한 것입니다. 프로네 님도 짧게라도 읽은 책들에 대한 서평을 꼭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2007 2.9 산비


‘낭만과 감성의 유럽 여행 에세이’라는 부제가 붙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먼 북소리>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어디선가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히 먼 곳에서, 아득히 먼 시간 속에서 그 북소리는 울려왔다. 아주 가냘프게.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먼 북소리>라는 제목은 이 모티브에서 따 온 것입니다. 어쩌면 책의 제목에 더 이끌려 이 책을 집어 들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멋있지 않습니까? ‘먼 북소리’


하루키는 나이 서른일곱이 되는 해에 이 여행을 감행합니다. 그리고 3년을 유럽에서 보낸 후 마흔 살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서른일곱이 되자 이대로만 살 수는 없다는 자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서른일곱’이란 나이는 저로서도 의미심장한 전환점이 되는 나이란 점에서 하루키와 묘한 동질감을 갖게 됩니다.


그가 말하는 ‘세월’이란 ‘새로운 것을 얻는 대신에 그때까지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었던 일을 앞으로 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하여, 그는 마흔이 되려 하는 즈음에서 마흔으로 넘어가기 전에 일생일대의 소설 두 권을 쓰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리고는 긴 여행을 떠납니다.


이 여행기는 무엇을 소개하고 안내하는 일반적인 여행기는 아니라고 작가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여행스케치와 같은 것으로서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마음 내키는 대로 친한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듯이 썼다고 합니다. 다만 몇 가지 내세운 원칙은 이렇습니다.


‘자기 눈으로 본 것을 자기 눈으로 본 것처럼 쓸 것, 안이한 감동이나 일반화된 논점에서 벗어나, 되도록 간단하고 사실적으로 쓸 것, 다양하게 변해 가는 정경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든 계속 상대화할 것.’ 그래서인지 본문을 읽어나가는 데, 마치 소로우의 <월든>을 읽는 듯한 기분이 느껴집니다.


처음 로마에 도착해서의 일들, 다시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겪은 일, 스펫체스 섬에서의 한 달간의 생활들을 담담하고 소상하게 적어 내려갑니다. 다소 무의미해 보이기도 한 이야기들이지만 글을 읽으며 ‘아, 무라카미 하루키는 사물을 이런 식으로 인식하고 표현하는구나!’하는 느낌이 남습니다. 워낙 유명한 사람이지만 사실 그의 책을 직접 읽어보기는 처음입니다. 계속 읽어나가면서 느낀 생각들을 적어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럼, 좋은 밤 되십시오.


2007 2.28 산비


어느 날 내가 눈을 떴을 때

사방이 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놀랐다.

어떻게 사방에 아무것도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지평선의 충격은 그렇다.

아무것도 없는데 아득한 곳에 선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직선이 아니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그 커다란 선은 둥글었고

그 텅 빈 원의 중심에 내가 있었다. - 최승호의 시 ‘지평선’


사막 한가운데에서는 아무리 앞으로 간다고 기를 써 봐도 결국 지평선으로 둘러싸인 원의 한가운데를 맴돌 뿐입니다. 결국 이 원대한 우주를 놓고 보면 우리는 아무리 버둥거리며 날고 기어 봐도 결국은 제자리걸음에 불과한 인생을 살고 있는 셈입니다. 헛되고 헛되고 헛된 삶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헛됨의 끝에 있을 공허에서 역설적으로 존재를 깨닫습니다.


텅 빈 원의 중심에 내가 있습니다. 내가 있어 사막이 있고, 내가 있어 우주가 있습니다. 꽃이 피어나야 신이 피어나고, 인간이 외칠 때 신은 들을 수가 있습니다. 꿈을 꾸되 꿈의 노예가 되지 않는 마음으로 이 광활한 현실 삶의 중심에 우뚝 서서 당당하게 신나게 멋지게 저 먼 곳 지평선 끝까지 달려가 봅시다.


어제 <바벨>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아직도 영화의 잔상과 잔향이 뇌리에 남아 흐릅니다. 장면 장면들이 가볍지가 않고 묵직하게 가슴을 두드리는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영화였습니다. 사이사이 허공을 응시하듯 삽입된 사막이며, 평원이며, 파란 하늘 등의 영상과 몽환적인 사운드의 흐름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음모나 나신을 드러내는 다소 충격적인 장면들도 충분한 개연성으로 인해 거부감이 없었으며, 청각장애로 인한 표현의 핍진함이나, 각자의 입장 차이로 인해 결국 주먹다짐까지 가게 되는 인간의 이기주의, 국경 검문소에서의 소통의 장애로 인한 사건의 발생 등은 <바벨>이라는 영화의 제목이 상징하듯 감독이 관객들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는지를 잘 나타내 주었습니다.


때로는 동병상련의 울분으로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하고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머리가 하해지기도 하며 영화를 보았습니다. ‘저 상황에서 나라면 어떻게 하였을까’를 계속 생각하며 영화에 몰입하였습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멕시코 태생의 ‘이냐리투’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전작 <개 같은 사랑>과 <21그램>이라는 영화를 통해 ‘천재 감독’이라는 호평을 받으며 칸 영화제의 레드카펫을 밟았다고 합니다.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야 볼 수 있는 거리에서 생면부지라고 믿고 살아가던 현대인들이 사실은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여 있다는 역설. 그리고 우연으로 격발 된 사소한 해프닝 하나 때문에 그 거미줄이 뻥 뚫려 버릴 수 있다는 비극적 진실.

“분명 고통스런 체험이지만, 진실이 그 안에 있다.” 신문에 실린 영화의 평처럼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소시민으로서는 다소 생경스럽고 거북하기도 한 체험이었지만, 그것들이 거부할 수 없는 우리네 삶의 모습이며 현실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랜만에 좋은 영화를 보았습니다.


2007 봄비 내리는 3월의 첫날 산비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으며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최대의 무기는 남보다 뛰어난 관찰력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 머리말에 말해둔 것처럼(자기 눈으로 본 것을 자기 눈으로 본 것처럼 쓴다) 책에는 자기 주변의 사물들, 만나본 사람들, 어떤 현상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써도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다면 ‘책 쓰기 정말 쉽다.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쓰면 될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겠지요. 우리가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것을 보고서도 그것을 글로 써보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반장을 채우기 힘들고, 어떤 이는 열 장을 채우고도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작가적 능력입니다.

그것은 단지 표현력의 차이일 수도 있고, 관찰력이나 기억력의 차이일 수도 있습니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본 것이 없을 수도 있고, 봤지만 기억에 남아있지 않기도 하고, 기억은 하지만 그것을 출력해서 표현해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훌륭한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심미안과 그것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표현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감성도 필요하고 끈기나 인내심도 필요한 일입니다.

“매일 계속해서 소설을 쓰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때때로 자신의 뼈를 깎고 근육을 씹어 먹는 것 같은 기분조차 들었다. 그렇지만 쓰지 않는 것은 더 고통스러웠다. 글을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글은 써지기를 원하고 있다.”


쓰는 일도 고통스럽지만, 써지기를 원하는 글을 쓰지 않는 것은 더 고통스럽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매일 편지를 쓰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쓰고 싶은데 쓸 수 없는 것은 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영원한 삶도 아니고 불멸의 걸작도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지금 현재의 일이다. 이 소설을 다 쓸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 있게만 해달라는 것뿐이다.”


하루키는 소설을 쓰면서 ‘나는 죽고 싶지 않다.’라고 계속 생각한답니다. “적어도 이것은 나 자신이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 소설을 완성시키지 않으면 내 인생은 정확하게는 이미 내 인생이 아닌 것이다.” 이런 투철한 작가 정신을 가지고 글을 쓰기에 과연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명성을 얻게 된 것이겠지요.


하루키는 달리기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여행지 어디를 가든 뛸만한 장소를 물색하여 이른 아침 조깅을 즐깁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낯선 도시에 가면 반드시 대중 술집에 가는 사람이 있듯이, 낯선 도시에 가면 반드시 여자와 자는 사람이 있듯이 나는 낯선 도시에 가면 반드시 달린다. 달릴 때의 느낌을 통해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일도 세상에는 있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책과 함께 한 오늘 오후를 마감합니다. 하늘은 여전히 찌푸린 상태이고 날이 많이 찹니다. 감기 조심하십시오.

2007 3.5 산비



무라카미 하루키의 유럽 여행 에세이 <먼 북소리>를 완독 하였습니다. 여행을 안내하기 위한 책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자기 독백적인 일기 같은 글이고, 주변을 스케치하듯이 적어 내려간 다소 건조한 글입니다.


아주 자질구레해 보이는 것까지 책에 써 놓았으며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을 시시콜콜 적어놓았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뭐 이런 얘기까지 주절주절 써놓았나 싶어 그 글을 읽고 있는 스스로가 조금 한심스러워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 바로 하루키가 들어있습니다. 그것이 하루키의 필체이고, 그것이 하루키의 생각이고, 그게 바로 하루키다 싶은 생각이 들자 그때부터 책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보고 적은 글을 읽으며 그리스의 외딴섬 시골 마을이 눈앞에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지금 그곳 현장에 서서 그곳을 둘러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내가 그곳을 여행하고 있는 여행객이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내일부터는 <김병종의 모노 레터>라는 책을 읽어보려 합니다. 잠시 들쳐보았는데 글이 착 감기는 맛이 있습니다. 김병종 님은 서울대 미대에서 회화를 전공하였고 파리, 시카고 등 해외에서 20여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이 대영박물관과 캐나다의 온타리오 미술관에도 소장되어 있다고 하네요. 서울대 미대 학장과 서울대 미술관장을 역임했으며 유가 예술 철학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동아일보, 중앙일보의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고, 현재 조선일보에 그의 글이 연재되고 있습니다. 재미있을 듯합니다.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눈 오는 날 박물관을 거닐 생각을 하니 행복한 흥분을 참을 길이 없습니다. 어린 왕자를 기다리는 사막 여우의 마음이랄까. 어서 시간이 흘러갔으면...


2007 3.7 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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