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인데도 천지가 어두움에 싸이는 날. 구름은 음산하게 몰려다니고 짐승 같은 바람의 울음이 거리를 핥고 가는 날. 시간의 불연속선 속에서 밤과 낮이 뒤집혀버린 듯한 느낌이 드는 날.”
간혹 그런 날이 있습니다. 김병종 님이 육신을 허물고 혼불로 타오른 푸른 넋 최명희 님을 만나던 날도 그랬답니다. <김병종의 모노 레터>를 읽고 있습니다.
‘모노 레터’라고 하는 걸 보면 one way의 편지를 말함인가 봅니다. 이 책은 어찌 보면 인물에 대한 기행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떤 사람과 관련된 장소를 찾아가 보고, 그곳 풍경과 함께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부분의 목차를 적어보면 이렇습니다. “침묵의 말, 세상을 토하다 - 유진규 / 태양을 사랑한 시대의 이단아 - 허균 /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 황재형 / 다시 노래는 꽃으로, 길은 저 봉우리로 - 김민기 / 잊혀진 순결과 열정의 혁명가 - 김산 / 자연과 인간, 연극이 하나 되다 - 이종일 / 식지 않는 플라멩코의 핏빛 자유 - 조광 / 시인의 가슴에서 흐르는 강물의 언어 - 김용택 / 산그늘에서 만난 음지식물의 자화상 - 박남준”
“많이 늙어버렸어요. 강이 수척해요. 물살의 빠르기가 예전 같지 않고. 水氣도 잘 전해지지 않아요.” 김용택 시인이 섬진강을 보고 이르는 말입니다.
강이 수척하다는 표현이 가슴에 와 닿아 애처롭습니다. 이러한 강을 조석으로 거닐 수 있는 시인이 부럽다고 하자 시인이 말합니다. 현실의 강만이 강은 아니라고, 강이 가슴속으로 흘러들게만 하면 누구라도 강을 가진 것이라고. 이제라도 우리는 모두 가슴마다 흐르는 강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누구나 가슴에 흐르는 강 하나를 가져야 한답니다. 당신이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가슴을 관통하여 흐르는 강입니다.
2007 3.9 산비
“하나의 아름다움이 익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의 슬픔과 하나의 고독도 함께 깊어져야 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떠나가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 손을 내밀어도 다시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을 그리워합니다./ 흰색과 백색은 다릅니다. 그것은 마치 선생님이 쓰는 먹색이 검은색과 사뭇 다른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김병종의 모노 레터>를 완독 하였습니다. 미대 교수이고 화가이지만 글이 정갈하고 맛이 있습니다. 문학을 기웃거리고 심취했었던 전력이 고스란히 글에 묻어납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책은 기행문인 동시에 인물 탐색기입니다. 김용택 님이나 윤이상, 김민기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들도 있고 권오철, 진은숙, 노은님, 정영희, 헬렌 권 등 우리에게 낯선 이들도 있습니다. 책을 읽으며 섬진강이나 강릉, 춘천, 베를린 함부르크에 대한 인상을 공유하고 묻혀있던 훌륭한 분들에 대해 알아가는 재미와 의미가 있었습니다.
책의 후반부에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홍대 앞 피카소의 거리, 용인에 있는 세중 옛돌 박물관, 이어령 님과 그의 부인 강인숙 여사가 운영하는 평창동의 영인 문학관, 화가 유경렬, 피아니스트 유경아 부녀의 삶과 열정의 보금자리 진해의 흑백다방, 방배동의 오래된 레스토랑 장미의 숲, 이런 곳들은 한 번쯤 가보고 싶어 지는 곳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먼 북소리>가 언급되어 있어 무척 반가웠습니다. 최근에 읽은 책이라 더욱 반가웠던 듯합니다. 책을 읽고 나면 마치 저자와 오래전부터 만나왔던 것 같은 친밀감이 듭니다. 감동을 받거나 재미있게 읽은 책이라면 더욱 그렇고요. 친구나 선생님 내지는 내편, 우리 편인 사람 대하듯이 팔이 안으로 굽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하루키와는 일면식도 없지만, 그를 다른 곳에서 접하면 우선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는 얼마나 더 도를 닦아야 흰색과 백색이 다르다는 것을, 먹색과 검은색이 다름을 느낄 수 있게 될까요? 열심히 노력할 밖에요. 끈기를 가지고, 식지 않는 열정을 간직한 채 한 발 한 발 나아가면 언젠가는 깨달음에 이르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 날을 고대해 봅니다.
2007 3.10 당신의 도반 산비
“장시간 야근을 해도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가벼워졌다. 늘 책을 지니고 다니면서 틈날 때마다 독서를 했다. 토요일이 오면 새 책을 빌려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철강 왕 카네기의 말입니다. 그가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책을 읽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빌 게이츠 조차도 컴퓨터가 책을 대체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읍시다. 책을 읽는 것은 정신적인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책을 읽으며 먼 세계와 무한한 우주와 대자연의 신비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는 꿈을 꾸게 됩니다. ‘그곳에 한번 가보고 싶다.’
“넓어지기 위하여 얼마나 촘촘해져야 하는지, 얼마나 촘촘해져야 넓어질 수 있는지, 밝아지기 위하여 얼마나 깊은 어두움이 익어야 하는지, 얼마나 깊게 어두워져야 밝아지는 것인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하여 얼마나 깊이 잠들어야 하는지, 얼마나 깊이 잠들어야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것인지...” - 김훈
강한 필력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같은 말을 해도 품위와 격조가 느껴지는 어투가 있습니다. 김훈이 그러합니다. 신영복 님도 그렇지요. 가벼운 말인 것 같은데 되새기면 묵직한 감동이 밀려옵니다. 아마도 그것이 그 사람의 내면에서 수백 번을 곰삭은 끝에 나온 말이라 그럴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가 그러합니다. 궁극에 이르면 변화가 옵니다. 아니, 궁극에 이르러야 진정한 변화가 태동합니다. 밤이 가장 깊어진 다음에야 새벽이 밝아오고, 달도 완전히 기운 후에야 다시 차게 되듯이.
거듭나는 것은 나를 완전히 비워내고, 새 마음과 새 정신으로 내면의 바닥을 단단히 다진 후에라야 가능합니다. 열심히 책을 읽고, 배우고 익힌 바를 세상 속에서 실천하고, 땀 흘려 달리고 산에 오르며 자연과 동화되는 삶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진정 멋진 사람들로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2007 3.14 당신의 책 벗 산비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