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킹 7일 차 (8월 3일)
= 계획 (13km/4hr) : Rif Bianchet - La pissa 10:50분 버스 - 벨루노 기차역 하차 - 점심 - 12:34분 기차 탑승 - 베네치아 Mestre역 15:02분 도착 - 베네치아 관광
ask는 질문이기도 하고 요구이기도 하다. 모르는 것을 물어보는 것도 되고, 가능한지를 타진하는 것도 된다. ‘에이 안 되겠지. 설마 들어줄까?’ 지레 겁먹고 미리 포기하지 말자. 되든 안 되든 일단 물어보기는 하자.
여행을 가서는 더 적극적으로 물어야 한다. “들어가도 되나요?” “먹어 봐도 될까요?” “태워주시겠어요?” “재워주시겠어요?” 1%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일단 시도는 해봐야 한다. 안 되면 할 수 없지만 후회는 남지 않는다. 시도는 해봤으므로.
폰타나 산장의 숙소는 15명 정도가 함께 한 방에 투숙하는 도미토리 두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조용히 짐을 챙겨서 방을 빠져나왔다. 종착지인 라 피사(La Pisa)에서 벨루노로 나가는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면 조금 서둘러야 했다.
숙소 안에서 꼼지락거리면 소란스러울 것 같아 일단 짐을 다 들고 나와서 밖에서 여장을 꾸리는 데 웬 여자 한 분이 우리처럼 짐을 싸고 있다.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시나요?” 그분은 오늘 알피나 산장(Rif. 7 Alpina)까지 운행한 후 거기서 하루 자고, 다음날 벨루노(Belluno)까지 걸어서 갈 거라고 한다. 전문 산악인들만 간다는 알타비아 1 정통 종주 코스다. ‘음메. 기죽어.’ 엄지를 척 들고 행운을 빌어주었다.
기념사진 한 장을 남기고 6시에 서둘러 산장을 출발했다. 네 시간 정도면 버스 정류장에 도착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 계산도 그동안처럼 여지없이 뭉개지고 만다. 구글맵을 돌려보면 도보로 3시간 40분 정도 걸린다고 나오는 길을 우리는 4시간 30분 걸려 도착했다. 아침에 일찍 서두르지 않았다면 버스를 놓칠 뻔했다.
계속 내리막 일 거로 생각했던 길이 얼마 안 가 오르막으로 바뀐다. 가이드북의 고도표에는 완만한 경사로 표기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급경사 오르막이다. 마지막까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한참을 끙끙거리며 힘을 써서 라 바레타 고개(Forcella La Varetta, 1701m)에 올라섰다. ‘이제부터는 정말 내리막뿐이겠지.’ 에고.
잠시 숨을 돌리며 아침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조식 도시락을 전날 산장 주인장에게 미리 부탁해두었었다. 곤란해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흔쾌히 샌드위치와 사과, 우유로 구성된 블랙퍼스트 봉지를 개인별로 준비해주었다. 땡큐.
샌드위치가 목이 메어 잘 넘어가지 않는다. 이태리식 샌드위치는 딱딱하고 질긴 두툼한 바게트 빵 속에 치즈 한 장과 살라미 한 장밖에 든 게 없다. 양상추와 피클, 토마토와 무스타드 소스가 들어간 화려한 샌드위치를 상상했다면 꿈을 깨시라. 그래도 앞으로 걸어야 할 걸 생각해서 꾸역꾸역 몇 입 베어 물었다.
두 시간쯤 걸어 이번 트레킹 코스의 마지막 산장인 비안체트 산장(Rif. Bianchet, 1245m)에 도착했다. 여기서 잠시 쉬어간다. 시원한 데미소다 음료수가 꿀맛이다. 산장에서 버스 시간을 다시 확인하고 판매 중인 버스표도 미리 구매했다.
비안체트 산장 이후의 산길은 굽이굽이 돌아가는 넓은 임도이다. 숲이 우거지고 계곡 물소리가 우렁차 즐거운 마음으로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그러나 버스 시간에 쫓기고 있어 마음이 그리 여유롭지만은 않았다.
임도에서 샛길로 빠지는 갈림길이 나타났다. 이정표에 Autobus라는 표시가 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길을 확인한다. 마침 같은 방향으로 걷던 커플 한 쌍이 정밀지도를 가지고 있어 도움을 받았다. 노르웨이에서 왔다고 한다. 내가 몇 해 전 스웨덴의 쿵스레덴에 트레킹 갔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그들은 그 길에 대해 잘 모르는 듯했다.
샛길로 들어서며 마지막 피치를 올려본다. 잰걸음으로 고도를 낮추니 어디선가 계곡 물소리에 섞여 붕붕거리는 차의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도로가 멀지 않았다는 신호다. 그동안 살면서 차의 소음이 이렇게 반가운 적이 있었던가? 협곡 사이로 폭포 하나를 지나자 절개지 같은 급경사 계단 아래로 도로가 나타났다. 10시 30분. 가까스로 10시 50분 버스 시간을 맞추었다.
길이 어떻게 끝나는지도 모르게 끝이 난다. 버스 정류장은 그 지점에서 300m 정도 도로를 타고 위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개선장군처럼 씩씩하게 아스팔트 도로를 걷는다. 미리 도착해 있던 선두 조원들이 정류장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마침내 이탈리아 돌로미테 산군에서 벌어졌던 우리의 전투적 트레킹이 모두 끝이 났다. 지금까지의 트레킹 중에 가장 모험적이고 도전적인 여행이었다. 누군가가 돌로미테의 아름다움은 알프스 몽블랑의 세 배쯤 된다고 하더니 과연 허언이 아니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웅장하고 숭엄한 경치들이 연신 감탄을 자아냈다. 거대한 바위들이 뿜어내는 기상과 골계미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계획보다 걷는 시간이 자꾸만 늘어나면서 무척 힘들고 고달팠지만 결국 해내고 말았다. 극한의 고통 뒤에 극도의 희열이 뒤따랐다.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해냈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뿌듯하고 행복하게 했다. 훗날 분명 오늘을 추억하며 함께 즐거워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