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의 세계에서 깨어나오려고 할 때

by 산비

오늘은 비교종교학자 오강남 씨가 쓴 <예수는 없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저자가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와 노장사상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진 분이란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저의 종교적 뿌리가 기독교에 있다는 것은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하지만 지금은 거기에 연연하지 않고 좀 더 자유로운 사상적 토대에서 진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고 있습니다.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라는 책을 쓴 현각 스님도 원래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난 사람입니다. 신부가 될 꿈을 키우며 예일 대학에서 철학을, 하버드에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하였지만 진리에 대한 목마름을 채울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숭산 스님의 강연을 듣고 삶의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그는 오랜동안의 번민과 고뇌 끝에 출가하면서 그의 부모에게 눈물의 편지를 씁니다. 자기가 가는 그 길이 두 분이 원하지 않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열심히 살아서 자기의 본성과 진리를 찾으면 고통에 빠진 중생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냐고 반문합니다. 그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출가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프로네 님도 언젠가는 종교에 귀의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으시지요? 이 책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저 같은 모태 신앙인에게 훨씬 더 와 닿는 도전적인 내용들이지만...


2005 10.14. 산비



오늘은 프로네 님이 주신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사람의 음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觀相이 不如音相이라’ 얼굴 관상 보는 것처럼 목소리의 상을 보는 音相이라는 게 있군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금의 성질이 있는지, 목의 성질이 있는지 등을 파악하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또 인체의 오장육부와 연관시킵니다. 사람마다 각기 목소리가 다른 이유가 오장육부가 다른 데서 연유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장 중에 비장이 강한 사람은 ‘음-’ 소리가 강하고, 폐장은 ‘아-’ 소리, 심장이 강한 사람은 ‘이-’ 소리, 간장은 ‘어-’ 소리가, 신장은 ‘우-’ 소리가 강하게 나온다고 주장합니다.


‘음, 아, 어, 이,우’의 음높이는 ‘궁, 상, 각, 치, 우’에 각각 배태되는 데 이것을 가지고 각각 해석을 붙입니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보아 ‘음’ 소리가 강하면 이는 비장이 튼튼한 사람으로 그 성격은 군왕의 성품이 있으나, ‘음’ 소리가 지나치게 강하면 교만한 성품일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아-’ 소리는 怒하는 마음이, ‘어-’는 원망하는 마음이, ‘이-’는 슬픈 마음이, ‘우-’는 음란한 마음이 들어있다고도 합니다.


‘음상을 본다는 것’은 이러한 ‘음, 아, 어, 이, 우’와 같은 소리의 기준에 맞추어 그 사람의 목소리를 분석해보고, 그 분류 등급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과 행동양식을 미리 짐작해보는 작업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正易’의 저자이기도 한 김일부 같은 사람은 ‘음아어이우’를 길게 반복하여 소리 내면서 춤추고 노래 부르는 ‘靈歌舞蹈’의 수련을 하기도 했다고 하더군요.


제가 프로네 님의 음성을 분석해보면 주로 ‘음-’의 소리가 강합니다. 약간 비음이 섞인 듯한... 적당하면 군왕의 위엄이 있는 좋은 목소리이지만 지나치면 다른 사람 말을 잘 듣지 않는 고집 세고 교만한 성격일 가능성이 있다던데... ^^


2005 10.14 산비



올 가을 들어 첫얼음이 얼었다는 소식입니다. 여름이 끝나고 나니 가을은 짧게 지나가고 겨울이 성큼 다가오는 걸 느낍니다. 벌써 올 한 해도 다 지나갔구나 하는 느낌과 이제 정말 어쩔 수 없이 마흔이라는 외투를 걸쳐야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서글퍼집니다. 중년 이후에 더욱 아름답고 성숙한 완숙미를 갖출 수 있다고도 하지만, 이제 막 마흔의 터널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서 지난 삼십 대의 시절을 뒤돌아보며 느끼는 회한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청춘이여! 이제 안녕.


분명한 건 인간은 방황 속에서 길을 찾고,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끝은 늘 새로운 시작과 맞닿아 있는 법입니다. 비록 삶은 우리를 늘 속이고 힘들게 하지만 그 고달픔을 불평하지 않고 견디어내면 반드시 영광의 순간이 오리라 믿습니다.


산에는 잘 다녀왔습니다. 해가 많이 짧아져서 6시쯤 되니 벌써 주위가 어두컴컴해지더군요. 아무도 없는 적막한 산속 바위 위에 걸터앉아 준비해 간 저녁거리를 먹는멀리 산사에서 뎅~뎅~ 하며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 나와 운치를 더해 주었습니다.


어제는 서점에 들러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서고에 꽂혀있는 수많은 책들을 둘러보고 또 한 번 우리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서고의 책들을 전부 다 읽고 싶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잠깐 하였습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제가 읽고 싶은 책들의 리스트를 손에 들고 책을 찾아 헤매고 돌아다녔습니다. 책을 한 권 한 권 발견할 때마다 마치 보물찾기 쪽지를 발견한 것 같은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한 인간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알의 세계에서 깨고 나오려고 할 때 적절한 시기에 탁의 역할을 해주는 그 누군가가 함께 해준다는 것은 인생의 축복이며 큰 행복일 거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저도 프로네 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저의 어미 닭이 되어 주십시오. 그래서 항상 제가 정신적으로 깨어 있을 수 있게 저를 좀 쪼아 주십시오.


2005 10.17 산비


-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라는 제목으로 인간극장에 소개되었던 박범준, 장길연 부부가 이번에 같은 제목으로 책을 냈습니다. 지금 그 책을 보고 있는 중입니다. 저의 평소 버릇대로 우선 책의 목차를 살펴보고 책의 서문과 에필로그를 먼저 읽어보았습니다.


“우리가 각자 걷고 있던 길은 우연하게도 어느 지점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점점 하나의 더 큰길을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박범준 씨는 유물론에 기초한 현대철학을 공부한 사람이고, 장길연 씨는 불교의 정신적인 영향 속에 자기 생각을 키워온 사람이었습니다. 극과 극일 수도 있는 그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수많은 대화를 나눈 끝에 비로소 오해 없는 대화가 가능해졌다고 합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면서 함께 갈 수 있다면, 둘이 함께 걸으면서도 혼자 가듯 자신의 줏대를 지켜 갈 수 있다면 정말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박범준 씨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문구 중, ‘혼자서’라는 말의 뜻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우리도 읽었던 법정 스님의 <홀로 사는 즐거움>이란 책을 통해 해석의 실마리를 얻습니다. ‘혼자서’의 뜻이 ‘외따로’가 아니고 ‘줏대 있게’ 즉 ‘다른 존재에 거리끼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라는 해석을 얻었답니다. ‘함께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지혜롭고 성실하고 예절 바르고 현명한 동반자’가 아닐까 말하고 있습니다.


저도 요즘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계속 사색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 하는 말들이 방식만 조금씩 다르지 결론은 한 방향으로 모아집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높인다거나, 둘이 함께 가면서도 줏대를 가져야 한다거나, 자기중심은 유지하면서 자신의 영역을 계속 확장시켜 나가면 결국 둘이 합일되는 순간이 오게 된다는 것, 그것만이 삶의 진정한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는 참사랑이라는 것들이 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2005 10.27 산비



“발설을 해버려야 속이 시원 해지는 火體의 기질, 화체의 성격은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좋게 말하면 머리가 명석하고 투명한 성격이지만 세간 생활에서는 본인에게 불이익으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마치 저를 두고 하는 이야기 같습니다. 좋고 싫음이 얼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고 가슴속에 말을 담아두지 못하고 발설을 하고야 마는, 그래서 손해 보는 경우가 많고 오해받기도 쉬운,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것이 제 사주인 것을...


어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하루 만에 끝내고, 오늘은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조용헌의 사주 명리학 이야기>를 다시 들고 흥미진진하게 읽어 나가고 있습니다.

‘이판’과 ‘사판’에 대한 이야기며, 명리학 대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재미있습니다. 액면 그대로 다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2만 례 이상의 임상 례를 거치면 눈이 트인다거나, 주문을 외워서 신을 부르고 앞으로의 일을 미리 예언을 하고 하는 약간은 허황된 이야기들이 조용헌 님의 맛깔스러운 필체를 거치니 실감 나고 재미가 있습니다.


“이는 본체의 세계이고 사는 현상의 세계이다. 이는 눈에 보이는 형이상의 세계이고 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형이하의 세계이다. 이는 공의 세계이고 사는 색의 세계와 같다.”


그동안 사판의 세계에 대해서 너무 편협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아직도 무당이라든지, 점에 대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조용헌 님의 글을 통 편견의 장막을 조금은 걷어낼 수 있어 보입니다.


앞으로는 이성과 감성의 세계를 지나 영성의 세계가 올 것이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그 말에 상당히 공감합니다. 사람 살기가 점점 복잡해지고 사회가 혼탁해질수록 영성의 세계에 대한 열망이 거세지리라 봅니다. 벌써부터 그런 조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요가라든가 마음수련원, 템플 스테이에 대한 인기가 그 증거입니다. 좋은 책 권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05 10.28 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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