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차기는 하지만 정말 청명한 가을 하늘입니다. 오늘은 버스 안에서 프로네 님이 빌려주신 신영복 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으면서 왔습니다. 우선 서문을 읽었고, 프로네 님이 밑줄을 그어 놓으신 부문들을 쭉 훑어보았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처럼 쓸데없는 말은 없다, 라는 문구를 읽고는 쇠몽둥이로 한데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니체를 통해 ‘영원히 당신을 사랑하겠다.’라는 말의 허구성에 대해서는 배움이 있었지만, 지금 현재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고백조차 소용없는 말이라는 것을 지적받고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이 사랑이 경작되기 이전이라면 그 말은 거짓말이며, 그 이후라면 아무 소용없는 말이라는 신영복 님의 말씀에 깊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독서는 타인의 사고를 반복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각거리를 얻는다는 데 참된 의의가 있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각자가 저마다의 삶의 터전에 깊숙이 발목 박고 서서, 그곳에 고유한 주관을 더욱 강화해나가는 노력이야말로 객관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우리가 그동안 계속 이야기하던 참사랑의 본질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사유를 계속하다 보면 진리는 정상에서 서로 만나고 통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대상과의 일체화야말로 우리들 삶의 진상을 선명하게 드러내 주는 동시에 우리 스스로를 정직하게 바라보게 해주는 것”
관계의 최고 형태를 설명하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랑이란 대상과의 일체화, 합일을 이루는 것이라는 것을 배운 바 있지요. 그것이 바로 ‘입장의 동일함’ 즉 ‘사랑이란 나란히 서서 한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을 서로 공유하는 것이라는 말씀도 와 닿습니다. “한 개의 나무 의자든, 높은 정신적 가치든 무엇을 공유한다는 것은 같은 창문 앞에 서는 공감을 의미하며...” 그것이 바로 입장의 동일함이며 참사랑입니다.
2005 10.29 산비
“지식을 넓히는 공부보다는 사색에 더 마음을 두고 생각을 높이는 노력에 더 힘쓰고 있습니다.”
신영복 님의 글을 읽다 보면 어떻게 서른 즈음의 나이에 이렇게 어른스러운 생각과 필체를 구사할 수 있는 것인지 감탄스럽습니다. 저는 그 나이에 아주 철없는 애에 불과했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감옥에 갇혀있는 몸이라 한 가지 화두를 잡으면 그것을 머릿속으로 세밀하게 분석하고 연구하고 정리해서 나름대로 개념을 정립해나가는 일에 오히려 몰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을 인식할 때 여하한 경우라 할지라도 반드시 어떠한 계기에서 발생하였으며, 어떠한 양상으로 존재하다가, 어떠한 방향으로 발전해 갔는가 하는 역사적 관계 내에서 파악되어야 하고 동시에 그 당시의 사회구조, 가치 규준에 조응시켜 인식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문장을 읽으면 신영복 님이 얼마나 논리 정연하고 객관적이고 열린 자세로 사물을 인식하려 했었는지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저절로 무릎이 꿇어지고 존경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한번 만나보고 싶은 생각도 들고요. 인터넷에 보니 <더불어 숲>이라는 (www. shinyoungbok.pe.kr) 사이트가 있어 신영복 님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관심을 가져볼 만하리라 생각됩니다.
2005 11.2 산비
날이 저물었습니다. 하루를 정리하고 마감해야 할 시간입니다. 오늘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제법 읽었습니다. 사실 저도 어떤 의미에서는 감옥 안에 수감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평 남짓한 공간 안에서 하루 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전망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한쪽 벽면이 창으로 되어 있어 눈 오고 비 오는 것과 손바닥만 한 하늘을 가끔 올려다볼 수 있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입니다.
오늘 하루 느리게 사는 삶을 실천해 보셨나요? 글을 쓰는 행위도 느림의 철학을 실천하는 길이라니 오늘 하루는 느림으로 마감하는 셈입니다. 우울한 삶이 지루하게 반복되던 중에 프로네 님 같은 좋은 문우가 생겨 삶에 활력과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있음은 저에게 큰 행운입니다.
“흙 한 줌보다 훨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내가 과연 꽃 한 송이라도 피울 수 있는지...”
바위 틈바귀에 굳건히 뿌리박고 자라나는 해당화와 소나무를 보고 경탄했던 적이 있습니다. 흙이 한 줌만 있어도 자연은 꽃을 피워내고 나무를 길러내는 데, 흙 한 줌보다 훨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우리는 과연 무엇을 피워내고 길러냈는지...
신영복 님의 글들이 건방지고 오만한 저의 부덕함을 단호하게 꾸짖고 채찍질합니다. 정리된 경험과 실천 없이 같잖은 지식인의 허울을 둘러쓰고서, 사물을 보기도 전에 머릿속을 뒤져 비슷한 지식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것으로 허세를 부리는 우를 자주 범하였습니다. 깊이 반성합니다.
2005 11.2 산비
11월이 시작되고 벌써 3일이 지났습니다. 마흔 고지를 향해 하루하루 전진입니다. 사실은 전진이 아니라 낭떠러지를 향해 밀어붙임을 당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신영복 님의 글이 참 달고 씁니다. 이 책을 가까이에 두고 여러 번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매년 이맘때가 되면 이 책을 빌려 주십시오. 그래서 10년간 10독을 하겠습니다.
‘이성’과 ‘감정’에 대한 말씀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전혀 다른 관점의 이야기입니다. 감정을 극복하는 것은 최종적으로는 역시 감정이라고 합니다. 일견 이성에 의하여 감정이 극복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경우도 실은 이성으로써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높이에 상응하는 높은 단계의 감정에 의하여 낮은 단계의 감정이 극복되고 있을 따름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감정의 抑壓이 아니라 이성의 啓發이라고 강조합니다. 부단히 이성을 계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자기 영역을 확장시켜 나가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높여 나가고, 뭐 다 마찬가지 이야기겠지요.
기다림은 더 많은 것을 견디게 하고 더 먼 것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신과 건강을 강하게 지탱시켜주는 힘이 된다 하네요.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합니다. 비를 함께 맞아줄 수 있는 친구가 됩시다.
2005 11.03 산비
신영복 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완독 하였습니다. 주역 64괘 중 맨 마지막 괘가 ‘未濟’ 괘로서 “어린 여우가 물을 거의 건넜을 때 그만 꼬리를 적시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로 주해할 수 있겠지만, 신영복 님은 처음에는 그 여우의 ‘작은 실패’를 교훈 삼아 어떤 일이나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실수하지 않도록 더욱 신중한 태도를 갖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유익하다고 해석했었답니다.
그런데 나중엔 생각을 달리하게 됩니다. 작은 실패가 있는 쪽이 없는 쪽보다 길게 보아 나은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 작은 실패로 해서 전체의 국면은 完結이 아니라 未完에 머물고, 그 미완은 더 높은 단계를 향한 새로운 출발이 되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실패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패의 발견이 필요한 것이며, 실패가 값진 것이 아니라 실패의 교훈이 값진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신영복 님의 글을 읽다 보면 정해진 엽서 한 장 분량의 틀 속에 어떤 사물이나 개념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정밀하게 요약하고 육화 해서 적어 놓아, 한 점 군더더기가 없는 사고의 精髓라고 받아들여집니다. 어떻게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었는지 존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납니다.
곧 겨울이 오겠지요. 겨울 추위는 몸을 차게 하는 대신 생각을 맑게 해준다고 합니다. 이번 겨울은 생각을 많이 하고 그 생각을 정리해보는 시간들을 가져봅시다. 무슨 자료를 조사하고 분석하며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신영복 님처럼 오롯이 화두에만 몰두하고 정리해서 서로 의견을 발표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2005 11.3 산비
니체는 말합니다. “인간은 이 세상 만물이 추구하는 목적이 결코 아니다. 인간의 생명이란 별들이 존재하는 목적과 아무 상관도 없다. 한마디로 인간이 지구에 붙어살게 된 것이지, 인간을 살아가게 하려고 지구가 생긴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인간은 멸종할 것이고 그러면 지상의 모든 신들도 멸종할 것이다. 이성 또는 공상의 미혹에 대한 통찰력이 강해지면 인간은 그리스도교를 버릴 수 있게 된다. 그것이 곧 인간의 자기 구원이다.”
니체는 지금까지 사람들이 진리라고 한 것들이 사실은 모두 거짓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자기가 처음으로 그들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낌새를 눈치채고 진리를 드러내 놓았다고 말합니다. 모든 가치의 전환, 그것이 자기의 살이 되고 천재성이 되어 인류에 대한 자기 성찰을 이루는 공식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자기로부터 비로소 희망이라는 것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성찰이고 자기 확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니체는 과연 위대한 인류의 정신적 구원자일까요? 괴팍한 미치광이에 지나지 않는 것일 까요?
니체의 인생론 에세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밤사이에 완독 했습니다. 이제 쇼펜하우어의 인생론 에세이 <사랑은 없다>를 잠자기 전에 틈틈이 읽어보려 합니다.
오늘도 열심히 책 읽기에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인식의 지평이 점점 넓어져 가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자아를 발견해 나가는 길을 열어 주리라 믿습니다. 그럼.
2005 11.10 산비
오늘은 오후 내내 모로하시의 책 <공자 노자 석가>를 읽었습니다. 공자, 노자, 석가가 서로 대면하고 앉아 가상 대담하는 형식의 글입니다. 석존의 空과 노자의 無, 그리고 공자의 天에 대해서 서로가 가지고 있는 견해를 밝히는 방식을 통해 유. 불. 선의 핵심 사상들을 논하고 있습니다.
극명하게 갈리는 것은 ‘배움, 가르침, 다스림’에 대한 견해입니다. 공자는 이들이 완전히 일치한다고 말합니다. 學이란 道를 배우는 것이고, 敎란 도를 가르치는 것이며, 治란 도를 행하는 것이므로 이 셋은 완전히 일치한다고 말합니다. 공자는 논어 ‘학이편’에서 또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깨달은 사람에게서 배우고, 그 배운 것을 되풀이하여 익히고 행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기쁨을 느끼게 된다. 자기가 몰랐던 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배워 그 배운 것을 완전히 깨닫게 될 때에는 스스로 감탄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또 논어 ‘위령공편’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일찍이 종일토록 먹지도 않고, 밤새 자지도 않고 전심으로 사색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결국 아무것도 얻는 바가 없었다. 자신의 마음에서 구하려고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것도 사람에게 배우고 성현에게 배워서 다른 많은 지식을 얻는 일에 미치지 못한다.”
공자는 책상 위의 학문보다 현실 사회에서 실천하는 것이 더욱더 커다란 의미의 배움이라고 강조합니다. 이는 신영복 님의 해석과도 일치하는 부문입니다. 다만 신영복 님은 독서보다도 ‘사색’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셨죠. 프로네 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독서와 사색의 우위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노자는 學, 敎, 治 가 모두 불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노자는 인위적이고 적극적인 모든 행위를 배제하고 , 배우고 가르치고 다스리는 것을 배격합니다. 진정한 성인은 不言의 가르침을 행해야 한답니다. 지혜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백성들에게 견딜 수 없는 번잡함만을 가르치는 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공자님은 논어 ‘양화 편’에서 자로에게 말씀하신 六言六蔽를 들어 배움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합니다. 다시 거기에 노자가 반론을 폅니다.
“학문도 끊고 근심도 없는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학문에 힘쓰면 매일매일 지식, 내용이 풍부해지겠지만 지식이 많아지는 것은 방황의 근본이 되므로 오히려 학문은 행하지 않는 편이 낫다. 진정한 도를 얻으려면 매일매일 모든 것을 털어 버려야 한다.”
과연 공자님 말씀을 따라야 할까요, 노자님 말씀을 실천해야 할까요? 어렵습니다. 제 생각은 일단은 공자님 말씀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어느 정도 배움을 통해 성취를 이룬 다음에라야 노자의 가르침에 따라 살 수 있지 않을까요? 프로네 님은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신지요? 배움과 無爲에 대해 토론을 좀 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책 내용 중 논어 ‘자장 편’에 근절近切 즉 ‘가까운데서 묻고 가까운데서 생각함’이라는 말이 나오는 데, 거기에 무슨 깊은 뜻이 있는지 혹 공부한 내용이 있으시면 가르쳐 주십시오.
또 하루가 저물었네요. 정말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러갑니다. 가는 시간을 붙잡아 둘 순 없겠지요. 다만 한정된 시간을 얼마나 유익하게 보냈느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유익이 되는 것인지, 공자와 노자의 가르침이 다시 저를 헛갈리게 하는군요. 정리된 생각들을 꼭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편안한 밤 되십시오.
2005 11.10 산비
기분 좋은 가을의 주말 아침입니다.
어제의 토론은 아주 흥미 있고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배우고 익힘의 중요성을 재확인하였지요. 허나 저의 생각은 배우기만 하고 생각의 정리가 없다면 ‘자기완성’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남의 생각을 따라 하는 것뿐이지요. 자기 주체성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배움에 우리가 70%의 비중을 둔다 하더라도 30%는 사유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솔직히 우리 삶을 들여다보면 실제 10%의 시간도 사색에 투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5% 즉 하루에 한 시간도 오롯이 생각에만 전념하지 못합니다. 그냥 상념이나 공상이 아니라 하나의 화두나 논제를 두고서 여러 가지 방향으로 생각을 펼쳐보고, 다시 그것을 규합하는 과정을 거쳐 하나의 정의, 개념을 얻어내야 합니다.
스페인의 랍비 ‘발타자르 그라시안’도 생각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라. 그리고 중요한 문제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하라. 어리석은 자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파멸한다. 그들은 사물 속에서 본질의 절반도 보지 못한다. 그 때문에 하찮은 일에 큰 가치를 두고 정작 중요한 일에는 작은 가치를 둔다. 현명한 사람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 그는 근본에 다다를 때까지 파고들며, 때로는 자신이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은 없는지도 생각한다.”
오늘 하루 깊은 생각에 한번 빠져보시기 바랍니다. ‘자기완성’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함인지에 관해서. 그럼.
2005 11.12 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