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잠시 접어두었던 <바가바드 기타>를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카르마는 결코 완전히 얽어매지는 못한다. 타락의 밑바닥에 떨어진 죄인도 설혹 저 스스로 덮어 누르고 아주 도망쳐 버리려 애를 써본다 해도, 제 힘으로는 도저히 꺼버릴 수 없는 빛을 속에 지니고 있다.”
이 구절을 읽고 문득 깨달음을 얻습니다. 우리가 ‘성선설’이다, ‘성악설’이다를 이야기하는데 정답은 바로 이 문구에 들어 있습니다. 위의 구절이 주는 의미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즉 모든 사람은 카르마(업)를 짊어지고 태어납니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성악설’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빛의 씨앗을 함께 가지고 태어납니다. 아무리 꺼보려고 애써도 끌 수 없는 한 가닥 진리의 빛, 존재의 바탈,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캄캄한 암흑의 세상에서 타락해 가는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한때 번쩍하고 지나가는 환상이 찾는 자의 늘 있는 체험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법열 속에 떠다님이 영구적인 신앙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환상은 다만 열어줌일 뿐이다. 그것은 튼튼케 해주는 것은 아니다. 환상으로 얻어진 지식도 생명의 다른 요소들에 의해 온전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마치 불교에서 ‘돈오돈수’의 깨달음을 얻은 뒤 그것을 보강하고 계속해서 점검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함과 통하는 말씀입니다. 어떤 신비적 체험이나 황홀경을 체험하는 것, 또는 삼매에 빠져드는 것들이 신앙의 본질은 아니라는 가르침입니다.
"넓게 배우고, 자세히 묻고, 삼가 생각하고, 밝히 가리고, 도탑게 행할 것이니...”
“남이 한 번에 한다면 나는 백 번해서 될 생각을 하고, 남이 열 번에 한다면 나는 천 번해서 될 생각을 하여서...”
<중용>에 나오는 가르침입니다. 깊이 새겨두어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밝아질 것이요, 아무리 약한 사람이라도 강해질 것입니다.
2006 1.31 산비
오늘은 어떻게 하루를 보내셨는지요? 힌두 경전의 수수께끼 같은 글귀들을 읽으며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진리 하나를 터득하면 밀려오는 전율에 온 몸을 부르르 떨게 됩니다.
“각 사람은 그 생애의 마지막에 이르러 특이한, 반복할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을 가진 생명체가 된다.”
참 재미있는 말입니다. ‘반복할 수 없는 독특한 모습’ 그 모습은 저마다 각자 다른 모습이겠지요. 다만 좀 더 아름다운 모습이 되기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산사라’ 즉 생사윤회의 바퀴는 고통인데, 그것을 영원히 끊어버리는 단 하나의 방법은 분별의 지식이랍니다. 이 분별의 지식은 대아에 대한 확신이 이루어지면 일어나는 데, 그 내용은 “나는 아니다” “아무것도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없다”하는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분별이 생기면 죄와 고통의 사슬에서부터 영원한 해방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힌두교의 성자들은 부딪히는 모든 것 속에 있으면서도 자기의 동질성을 가지고 모든 공덕과 복을 확신하며 구원의 직로를 걸었다.”
쇼펜하우어의 말입니다. 이 구절을 보며 ‘줏대’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혼돈 속에서도 줏대를 가지고 믿음으로 무장한 채 자신의 길을 당당히 걸어 나가면 브라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의 해석입니다.
누구나 희망과 좌절이 교차하는 저마다의 삶을 힘들게 살아가기 마련이지만, 저 먼 곳에서 무심히 바라보면 서로 구분할 수 없고 연결되기 어려운 점 하나하나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삶을 살아갈수록, 나이를 먹어갈수록 삶이 특별하게 차이 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아무리 잘난 척하고 재보았자 거기서 거기 아니겠습니까? 결국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우리 인생이지요.
이번 주 안으로 <바가바드 기타>를 끝내고 다음 주에는 그동안 밀렸던 책들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2006 2.2 산비
<바가바드 기타> 제 14장 ‘3성 분별’ 편과 15장 ‘멸, 불멸을 초월하는 지상 자아’ 편을 읽었습니다. 책을 읽을수록 힌두의 사상이 불교와 많이 닿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불교가 힌두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14장은 ‘인간의 향상’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다 힘써서 주로 善性의 원리가 주장하고 있는 지경에 올라가도록 하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三性을 초월하여 완전한 인간, ‘구나티타’에 이르러야 한답니다. ‘구나티타’를 빛을 바라지도 않고 누가 흔들어도 까딱없는 돌의 특성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차이점은 ‘구나티타’는 완전한 의식을 가지고 얽맴을 떨어 버렸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물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얼음이 증기가 되어 공중에 올라가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게 하는 것처럼, 우리도 노력하여 우리 자신을 증발시킴으로써 우리 속에 있는 사사로운 나를 없애버리고 무한에 들어 모든 것에 대한 영원한 善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줍니다.
“어떤 길로 도달했든 간에 완전에 이른 사람의 모습은 같다.”
“오만함이 없고, 헤맴이 없는 사람, 집착에서 오는 사악을 이기고 항상 참 자아에 머물러 있어 애욕을 가라앉히고 고락의 상태에서 해방되어 현혹당하지 않는 사람”
이는 제가 이르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이를 성취하면 불멸의 지경에 이른다고 합니다.
덕분에 좋은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프로네 님이 이 책을 선택한 것은 탁월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마저도 신이 이끌어준 결과라고 여겨집니다. 마지막까지 다 읽고 전체적인 안목으로 <바가바드 기타>의 말씀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이야기를 나누어 봤으면 합니다. 그럼, 편안한 밤 되십시오.
2006 2.3 산비
마침내 <바가바드 기타>를 완독 하였습니다. 제16장 ‘거룩한 바탈과 귀신 바탈’, 17장 ‘세 종류의 신앙’, 18장 ‘내버림에 의한 해탈’을 연이어 읽고 끝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이 경전이 어디에서 연원 하고, 어떻게 편집되었는지, 의의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해설 서문을 읽어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제 마음속에 어떤 절대자를 간직하고 있는지 의심하고 살아왔습니다. 기독교적인 하나님에 대해 냉소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한동석 님도 이야기하고, 함석헌 님도 그러했듯이 인격, 비인격을 초월하는 어떤 궁극자가 반드시 이 우주에 존재해야만 이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맑은 이성으로 마음을 통일하고, 굳센 뜻으로 자기를 억제하며, 소리 따위 감각의 대상을 물리치고, 좋고 언짢고를 내버리고, 고요한 곳에 홀로 있으면서, 적게 먹고, 몸과 말과 뜻을 억제하여 명상과 요가에 전념하고, 언제나 離欲에 의지하며, 아집, 폭력, 오만, 욕망, 분노, 탐욕을 벗어나 我欲이 없고 마음이 잔잔한 사람은 브라만과 하나 됨을 얻을 수 있느니라.”
지금까지 말씀의 종합입니다. 위에 적힌 대로만 우리가 수행하며 살아가면 언젠가는 진정 해탈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2006 2.7 어느 눈 내린 겨울밤에 산비
“나는 더듬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조바심으로 비틀거리며, 그러나 무르익기 전에는 나서지 않겠다는 설익은 완벽주의를 내 안에 품고.”
“하지만 완전한 것이 어디 있을까? 수영을 잘하기 전에는 수영장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식의 각오라니, 배신이 두려워 친구를 사귀지 않거나 이별이 두려워 사랑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비바람을 맞으며 다져지고 상처를 통해 익어 가는 불완전한 길의 여정이 청춘인 것이다. 자 머뭇거리지 말고 발을 내디뎌.”
<머뭇거리지 말고 시작해>라는 책에 실린 이희재 님의 글입니다.
“수영을 잘하기 전에는 수영장에 들어가지 않겠다.” 이 무슨 모순된 말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또 얼마나 자주 이 말도 안 되는 모순을 저지르며 살고 있는지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기회들을 주저하고 머뭇거리면서 날려 버렸는지를.
이제 용기를 냅시다.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상에 선 사람들은 그 수준에 이르기까지 남모르는 노력과 피눈물나는 과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과정을 단축시킬 수는 있지만 생략할 수는 없습니다. 산에 오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한 걸음 발을 내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다 보면 기어코 정상에 설 수 있습니다.
잘 안된다고, 너무 힘들다고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지금부터라도 주어지는 많은 기회들을 머뭇거리지 말고 잡으시기 바랍니다.
“머뭇거리지 말고 시작해”
2006 2.8 산비
“진정한 2막은 자기를 찾는 과정이며 자신의 영혼까지 한 단계 성숙한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이다.”
스테판 M. 폴란의 <2막>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프로네 님이 먼저 읽고 줄을 그어주신 덕분에 더욱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밑줄 쳐주신 부분을 읽을 때는 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읽게 됩니다.
“절충안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완전히 얻지 못한다. 늘 뭔가 부족한 상태에서 추구하던 것을 멈춰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높은 성취를 얻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현실에 타협하지 말고 긴장과 변화를 받아들이라고 충고합니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옮겨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내게 ‘왜 당신 자신으로 살지 못했습니까?’하고 물을 것이다.”
예수처럼 살겠다. 누구누구처럼 살겠다가 아니라 자신의 길을 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비록 일부의 조롱이 따르더라도 무시하고 나아가랍니다. 누가 나를 어떻게 보든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 인도의 ‘압둘칼람’ 대통령이 국빈 방문 중입니다. 그는 힌두교도가 90%인 인도에서 무슬림으로서 대통령이 된 사람입니다. 종교의 차이로 파키스탄과 그렇게 전쟁을 벌이면서도 이슬람교 출신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인도의 포용력이 대단합니다.
“꿈은 생각을 낳고 생각은 행동을 낳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일을 하다 보면 문제가 생기고 그것을 풀어야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행동하라는 말입니다. 가만히 있지 말고 나가서 싸우라고 크리슈나가 얼마나 강조했던가요. 우리가 <바가바드 기타>를 읽으며 끊임없이 되새김질했던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또 인도의 대통령 압둘칼람이 하고 있습니다. 인도인들은 누구라도 한마디 내뱉으면 다 영적 울림을 일으키는 신비한 능력이 있나 봅니다.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인도 핵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핵물리학자를 거쳐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그에게 그 비결을 묻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원하는 일을 이루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먼저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끊임없이 지식을 추구해야 하며, 땀 흘려 노력해야 한다. 어린 시절 선생님이 주신 이 가르침을 평생 가슴속에 지니고 살았다”
나에게도 평생 가슴속에 지니고 살아갈 가르침이 있는지 눈을 감아봅니다.
2006 2.10 산비
우둔하고 무지한 이들에게도 귀 기울이라.
시끄럽고 공격적인 사람은 피하라.
영혼을 괴롭히는 자들이다.
직무수행에 신중함을 견지하도록 하라.
세상은 속임수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불행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강인한 정신력을 키워라.
하지만 암울한 상상으로 스스로 의기소침해 지지는 말라.
혼잡한 삶 가운데 당신의 노력과 열정이 무엇이든지, 영혼의 평화를 유지하도록 하라.
속임수와 고된 일상, 그리고 깨져버린 꿈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므로 힘을 내라. - 맥스 어만
미국 시인 맥스 어만의 ‘Desiderata(소망)’이라는 시입니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아름답다 합니다. 세상과 자연은 어김없는 규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섭리 하에 모든 것은 가고 또 옵니다. 오늘 해가 저물고 나면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뜨는 것입니다.
산은 그냥 거기 있었을 뿐인데 우리는 산이 이렇다 저렇다 떠들어댑니다. 그렇지만 산은 개의치 않고,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존재할 뿐입니다. 산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역사와 문화 속에 콘텐츠의 보고가 있고, 인문학도들의 나아갈 길이 있다.’ 하신 프로네 님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 옛날 사람들은 모든 것을 통합적으로 인식하고 사고하였던 것 같은 데, 현대의 우리들은 너무 단편적인 생각에만 젖어 있는 게 아닌 가 반성합니다.
보다 포괄적이고 유연한 사고 습관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배움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열심히 배우고 익혀, 언어와 종교와 철학과 자연을 종합적으로 통찰하는 우주적인 사고를 키워나갑시다. 보다 격조 높은 사유를 통해 사물과 인간을 인식하고, 미처 몰라서 저지르는 어리석은 실수들을 조금이라도 줄여나갑시다.
끊임없는 공부와 체험을 통해 인식의 지평을 날로 넓혀 나가시는 프로네 님이 늘 부럽고 존경스럽습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2006 2.14 산비
잔뜩 찌푸린 겨울 아침입니다. 오늘 낮부터 비가 올 거라는 예보입니다.
2막을 펼치기 위해 중요한 것은 간판(백그라운드)이 아니고, 경험과 실질적 기술이라고 스테판 폴란은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기술을 어떻게 가지게 되었느냐보다는, 실제로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질적인 기술을 갖추기 위해 더욱 노력합시다.
폴란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인생과 행복에 대한 통제권을 내가 아닌 외부에 허용한다면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고 그것이 숙명이지만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 살 것인가의 통제권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으며, 그것을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앨리스터 크롤리의 다음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인생의 즐거움은 에너지의 활용, 지속적인 성장과 변화, 새로운 경험이 주는 기쁨으로 이루어져 있다. 멈춘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멈추지 말고 열정적인 추진력으로,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갑시다. 인생엔 2막뿐만 아니라, 3막, 4막도 있습니다. 지금에 안주하면 결국 도태되고 맙니다. 하나를 성취하고 나면 또 새로운 목표를 구상하고 계획을 세워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멈추면 안 됩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 훗날 눈을 감으며 후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참 잘 살았다. 아름다운 생이었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죽게 되기를 원합니다.
2006 2.15 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