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블랑 일주(TMB) 2

트레킹 2일차

by 산비

: 발므 산장(Chalet de la Balme, 1706m) - 본옴므 고개(Col du Bonhomme, 2329m) - 크르와 본옴므 산장 (Refuge du Col de la Croix du Bonhomme, 2443m) 점심 - 푸르 고개(Col des Fours, 2665m) - 글래시어 마을(la Ville des Glaciers, 1789m) - 모떼 산장(Ref des Mottets, 1870m) 근처 야영


가장 즐거운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원할 때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입맛을 다 맞추려고 신경 쓰다 보면 에너지만 끝없이 소모하고 만다. 때로는 모른 척하고 내 방식대로 밀고 나가자. 나 스스로 납득할 수 있다면 가끔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야 인생을 즐길 수 있다. 즐겁지 않은 삶은 의미가 없다. 즐거운 인생, 그것이 행복한 인생이다.

간밤엔 굵은 비가 소란스럽더니 아침엔 다행히 맑게 개었다. 산에서 맞는 첫 번째 아침이다. 우리의 아침은 5-6-7로 시작된다. 5시 기상, 6시 조식, 7시 출발. 그러나 텐트를 걷고 짐을 정리해서 다시 싸는 일이 제법 시간이 걸리는 일이어서 보통은 7시 반이 되어야 출발할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주변 산책과 도수 체조다. 밤새 굳어진 몸을 풀어주는 데는 아주 그만이다. 구령에 맞춰 십분 정도 몸을 풀고 나면 몸이 달궈지고 관절들이 부드러워진다.


오늘 아침 메뉴는 황태된장국. 계획했던 식단에는 없던 메뉴다. 김샘이 배분받지 않은 된장 시래기 양념 세 뭉치를 몰래 가져왔다. 고맙긴 한데 규정 위반이다. 그만큼 짐이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마음이 참 갸륵하다. 된장 양념에 즉석 황태국을 넣어서 같이 끓였더니 국물이 시원하고 개운하다.


- 코끼리의 진군 소리가 -


오늘의 첫 번째 목표 지점은 발므 산장을 지나 본옴므 고개(Col du Bonhomme, 2329m)에 올라서는 것이다. 매일 대략 두 개 정도의 고개 마루를 넘는 일정이다. 하루에 북한산, 도봉산 두 개의 산을 올랐다 내리며 종주하기를 5일 동안 계속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 같다. 하루에 북한산과 도봉산을 끝에서 끝까지 종주하는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최소 9시간에서 10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고된 산행이다. 더군다나 텐트, 침낭, 매트를 장착한 무거운 박 배낭을 메고 매일을 그렇게 걸었으니 생각해보면 참 대단한 일을 해냈다.

아침 햇살이 산등성이를 환하게 비추고 계곡에는 산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소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아침식사를 즐긴다. 이곳 알프스는 소의 천국이다. 초지가 많아서인지 여기저기 소를 방목하는 목장들을 자주 볼 수 있다. 풀밭에는 으레 소똥이 널려있기 때문에 풀밭에 앉을 때는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소의 목에는 커다란 워낭이 달려있어서 가는 곳마다 소의 워낭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알프스 걷기 여행의 배경음악은 워낭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신작로처럼 길게 뻗은 로만 로드를 걷는다. 코끼리의 진군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로마의 길을 걸으며 로마에 대한 역사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니발이며 시저에 대한 이야기, 루비콘 강과 시오노 나나미의 책에 대한 이야기 등등. 그런데 그만 이야기가 꼬이고 만다. “그러니까 한니발이 코끼리를 몰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쳐들어 올 때 시저가 루비콘 강에 배수의 진을 치고...” “에구 그게 뭔 소리여. 역사 공부 좀 제대로 하자!”


- 그리 착해 보이지는 않는 착한 고개 -


발므 산장 조금 못 미쳐서, 그러니까 우리가 잤던 야영지에서 한 시간쯤 떨어진 거리에 공식 지정 야영지가 한 군데 더 있었다. 그곳에서 야영을 한 트레커들이 열심히 텐트를 걷고 있다. 바로 옆에는 화장실과 벤치도 마련되어 있다. 우리도 벤치에서 잠시 쉬며 화장실에 들러 밀린 결재들을 받았다. 알프스에 온 뒤 여태 아직 한 번도 결재를 받지 못한 사람도 있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길을 나선 터라 발므 산장은 그냥 통과한다. 본옴므 고개까지는 계속된 오르막이다. 아침부터 햇볕이 따갑게 내리쪼이니 벌써부터 땀이 흥건하다. 무리하지 않고 한 시간에 한 번 정도 쉬는 시간을 가졌다. 발므 산장이 시야에서 멀어질 즈음 느닷없이 눈밭을 만났다. 여름에 밟아보는 하얀 눈밭이 신기하기만 하다. 모두들 강아지 마냥 신이 나서 눈밭을 뒹굴며 여름 속의 겨울을 만끽한다.

드디어 해발 2329m의 본옴므 고개에 도착했다. ‘Bonhomme’ 라는 말은 불어로 ‘착한 사람’, ‘괜찮은 사람’을 뜻한다는데 산새가 그리 착해 보이지는 않았다. 뭐 ‘그랑조라스’ 같은 침봉들에 대면 착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고개 마루엔 조그만 무인 대피소가 있다. 비바람이 몰아칠 때 잠시 비를 피해 가는 곳이다.

본옴므 고개를 출발하여 30분 남짓 더 오른 끝에 크루와 본옴므 고개(Col de La Croix du Bonhomme)에 도착했다. 원래는 이곳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진행해야 하지만, 고개 바로 아래에 있는 크루와 본옴므 산장 근처에서 점심을 해 먹고 가기로 한다. 산장 옆 평평한 언덕에 그늘 막(타프)을 치고 터를 잡았다. 요 그늘 막은 이번 트레킹을 위해 새로 장만한 장비이다. 전에 가지고 있던 타프는 무게도 많이 나가고 낡아서 제 기능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 가벼운 기능성 타프를 새로 장만해서 가져왔다. 비가 올 때와 햇볕이 강할 때 아주 훌륭하게 제 역할을 해주었다.


- 바람이 불면 금방 한기가 -

오늘의 점심 메뉴는 짜파구리.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함께 비벼먹는 특제 요리다. 잃었던 입맛을 돋우는 데는 아주 그만이다. 점심을 먹으면서 지난밤에 비에 젖었던 물품들을 내다 말렸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바로 출발하지 않고 30분 정도 낮잠을 잤다. 점심 먹고 이렇게 한숨씩 자면서 휴식을 취한 것이 체력 회복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자리를 말끔히 정리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고개에서 산장까지 내려왔던 길을 십분 정도 다시 되올라가야 한다. 고개에서 이번에는 우측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만년설이 남아 있는 푸르 고개(Col des Fours, 2665m)가 나온다. 처음에는 푸르 고개에 배낭을 풀어놓고 북쪽 전망대(Tere Nord des Fours, 2756m)라는 곳에 다녀올 계획을 세웠었다. 그곳 정상에 올라서면 풍경이 사방팔방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정상까지 왕복 40분이면 다녀올 거리다.

그런데 점심을 먹고 너무 오래 쉰 탓인지, 아니면 벌써 많이 지친 탓인지 다들 의욕이 없다. 잠깐 망설이는 사이 찬바람이 불면서 체온이 떨어지자 모두 말없이 배낭을 들쳐 메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햇볕이 쬐면 더워서 헉헉거리다가 그늘이 지고 바람이 불면 금방 한기가 몰려온다. 참 희한한 날씨다.


- 빙하 개울물의 위력 -


오늘의 두 번째 목표지점은 빙하 마을(la Ville des Glaciers, 1789m)이다. 치즈를 생산하는 가공공장이 있어 ‘치즈 마을’로 불리기도 한다. 빙하 마을까지만 내려가면 모떼 산장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오늘의 야영지는 빙하 마을에서 모떼 산장까지 이어진 개천가에서 적당한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빙하지대를 지난 후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벌판을 걷는다. 강렬한 태양을 등에 지고 내려오는 길이라 금세 온몸이 땀에 젖었다. 마침 빙하수가 내려오는 개울을 만나 잠시 발이라도 담가보고 가기로 했다. 그런데 물이 얼마나 차던지 일분도 채 발을 담그고 있을 수가 없었다. 작은 개울물이지만 큰 강물 같은 위력을 발휘한다.

얼음물에 발바닥의 열기를 식힌 덕인지 절로 힘이 났다. 개운해진 마음으로 속도를 높여 내리막을 내려갔다. 빙하 마을까지는 두 시간 정도 더 내려가야 한다. 알프스에는 지도에 나오지 않는 샛길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다. 미국 존 뮤어 트레일에는 샛길을 절대 내지 말라는 규정이 있다. 이곳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목동들이 양치고 소치면서 이리저리 길을 냈는지도 모르겠다. 빙하 마을까지 가는 길에도 몇 군데 갈라지는 곳이 있어 조금 고민이 되었다. 이스라엘에서 왔다는 두 아저씨가 우리와 동행하며 서로 상의하면서 길을 찾아갔다. 마침내 소들이 많아지며 언덕 아래 빙하 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제대로 찾았군!’


- 영혼의 음식 -


치즈를 조금 사볼까 싶어 마을을 둘러봤지만 안타깝게도 일과가 끝났는지 인기척이 없다. 마을 공터에 관광버스가 서 있어서 정보를 좀 얻어 볼 요량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기사가 영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한다. 프랑스 사람 다섯 중에 한 명 정도만 영어를 사용하고 나머지는 영어에 서투르다. 표지판이나 메뉴판에서도 영어를 전혀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일본과 한국처럼 영국과 프랑스도 뭔가 앙금이 남아있는 게 아닌가 싶다. 하긴 백 년 동안 서로 죽기 살기로 치고받고 싸운 나라들 아닌가. 버스 승객 중에 영어가 되는 이가 있어 중간에서 이야기를 연결해준다. 근처에 캠핑장은 없고 산장에서도 야영은 안 될 것이란다.

주변의 개울가에서 야영할 만한 장소를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마땅한 곳이 눈에 띄지 않았다. 일단 모떼 산장(Refuge des Mottets, 1870m)까지 가보기로 한다. 오늘도 열 시간 넘게 길 위에서 시간을 보냈다.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빙하 마을에서 삼십 분을 더 걸어서 모떼 산장에 도착했다. 산장은 숙박하는 여행객들로 제법 붐비고 있었다. 건물이 다섯 동으로 구성된 제법 규모가 있는 산장이다. 우리는 우선 어찌 됐든 목을 좀 축이기로 했다.

주문을 하니 예쁜 글라스에 시원한 생맥주가 담겨 나온다. 어찌나 시원하던지. 아마 이번 여행을 통 털어 먹어 본 맥주 중에 최고의 맥주가 아니었나 싶다. 맥주를 마시며 산장 아가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혹시 야영할 만한 장소가 없을까요?” “산장 위 언덕으로 올라가시면 바위 뒤에 넓은 공터가 있어요.” “오케이! 땡큐!”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반가운 소리였다.

수낭에 식수를 받고 저녁에 마실 와인도 3리터 확보해서 언덕 위로 올라갔다. 프랑스에서 제일 푸진 것이 와인이다. 1리터에 10유로. 우리 돈으로 만 이천 원 정도. 반면 소주는 200ml 작은 페트병이 10유로다. 언덕 위 공터에는 이미 텐트 한 동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옆 평지 풀밭에 우리의 잠자리를 마련했다. 눈앞에 펼쳐진 전망이 가히 절경이라 야영지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저녁 메뉴는 된장 부대찌개다. 된장 시래기에 어제 꽁따민에서 구입한 프랑스산 소시지와 햄을 넣고 양념장을 넣어주니 맛이 기가 막히다. 결코 재현할 수 없는 맛이다. 평생 딱 한 번 먹어볼 수 있는 이 세상 유일무이한 음식이 완성됐다. 여기에 모떼 산장 표 하우스 와인을 곁들이니 그야말로 최고의 만찬이 되었다. 와인은 또 얼마나 맛있던지. 과하게 무겁지 않고 그렇다고 달지도 않은, 적당히 쌉싸름한 풍미가 입안을 가득 적신다. 마무리는 라면 사리. 부대찌개에 라면사리가 빠지면 그건 바람 빠진 축구공, 앙꼬 없는 찐빵이다. 라면이 지친 몸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아니 지친 몸이 아니라 지친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먼 타향 땅에서 라면은 영혼의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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